미얀마인 맞춤 선교하는 실로암교회25년간 사랑주고 복음심으며 섬겨미얀마에 교회창립 등 선교 결실 주렁주렁

 


국내이주민 선교는 재정은 덜 들이고, 사역은 더 할 수 있는 최적의 해외선교이다. 우리사회에서 난민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이지만 우리는 ‘이주민선교’의 측면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부천에 위치한 실로암교회(이명재 목사)는 25년 전부터 국내에 거주하는 미얀마 근로자를 섬겨왔다. ‘이주민선교’는 차치하고 국내 외국인들을 돌봐야 한다는 의식조차 없던 시절부터 시작한 그 사역은 험난함  자체였다. 하지만 오랜 세월 하나님만 믿고 미얀마인을 섬긴 선교의 결과 이들로 인해 미얀마 현지에 성결의 복음의 열매가 맺혀가고 있다.

이명재 목사는 1993년 처음 미얀마인을 만난 후 이주민선교를 시작했다. 그는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국에 와서 철저히 소외된 삶을 살아야했던 미얀마인들의 보호자가 되어주었다. 당시 가난한 전도사라 수중에 돈도 없고 인력도 없었지만 이 목사 부부는 하나님만 믿고 기도하고 섬기며 고된 사역을 시작했다. 먼저 춥고 어두운 지하실에 사는 미얀마인들을 위해 볕이 따뜻하게 들어오는 예배당을 마련하고, 씨 뿌리는 심정으로 기도하고 예배하며 온 마음으로 미얀마인들을 품었다.

이 목사는 “1993년부터 시작된 1기 사역은 부족한 것 투성이라 사랑 밖에 줄게 없었는데 그때 양육했던 이들이 열매를 맺고 있다”고 말했다. 당시 실로암교회 성도였던 묘투 씨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전도사가 되었고, 난다 씨는 미얀마에 가정교회를 세웠다. 또 원나 씨는 양곤 실로암교회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2기 사역(2002년~2007년)은 가장 왕성했던 시기로 미얀마의 다양한 족속들이 교회 안에서 하나 되어 예배하고 세례 받고 가장 신나게 신앙생활을 이어가던 때였다. 2008년 3기 사역에서는 버마족과 소수부족들이 교회를 많이 찾아왔지만 복음을 잘 받아들이지 않아 어려운 시기였다. 하지만 그들도 결국 신실한 신앙인으로 성장한 사례가 많았던 시기라고 이 목사는 설명했다.

25년 사역의 4기에 해당하는 2014년부터 현재까지는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 많이 유입되고 있어 이 목사는 선교전략을 바꾸었다. 미얀마인 리더를 간사로 세웠는데 동족이 통역도 하고 미얀마 성도들의 마음도 잘 아울러 미얀마 젊은이들을 교회로 잘 이끌어주고 있다고 했다.

지난 25년 동안 실로암교회에서 돌봄 받고 신앙을 갖게 된 이들이 미얀마에 돌아가 이룬 성과는 기대 이상이다. 미얀마는 외국인의 자국민 전도는 불법이지만 자국민의 자국민 전도나 교회 설립은 가능하다. 그래서 현지인의 역할이 중요한데 실로암교회 출신 리더들이 그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 것이다.

2005년에는 양곤 실로암교회가 세워졌고, 빈민가에 공부방과 유치원도 문을 열고 다음세대도 복음으로 돌보고 있다. 고국에 돌아가 한국어 통역관으로 일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데이빗 집사는 현지에 기도원을 세워 미얀마의 갈멜산기도원으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품고 있다고 했다. 피터 집사는 미얀마 만달라이글로리교회를 300명 넘는 교회로 부흥을 이끌었고, 현재 교회를 5층으로 증축 중에 있다고 전했다.

실로암교회은 어떻게 이런 큰 선교결실을 맺을 수 있었을까. 실로암교회는 화요일 전도사역과 쉼터사역, 심방과 체력단련 사역을 진행하고, 토요일에는 가끔 사회 각 분야의 리더를 초청하는 희망특강을 열고, 정기적으로 토요성경공부 사역을 진행한다. 주일에도 예배 후에는 한글공부를 열고 있다. 기타 등 악기강습도 한다. 이 밖에도 분기별로 건강검진을 돕고 일년에 두 번 복음초청잔치도 열고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프로그램보다 사랑을 꾸준하게 주고 조바심 내지 않고 복음을 심는다는데 있다.

이명재 목사는 “지금도 실로암교회는 작은교회이고 외국인 사역도 다양하고 크게 하지 못하지만 최선을 다해 사역하고 있다”면서 “작은교회도 각 나라를 품고 특화된 선교전략으로 이주민선교를 할 수 있다. 큰 교회는 작은교회가 이런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후원해 함께 해외선교를 이루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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