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양심은 사물의 가치를 변별하고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의 판단을 내리는 도덕적 의식으로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고귀한 가치라고 말을 하고 있다.

또 양심은 정의라고 말한 사람도 있다. 칸트는 “인간의 내적인 법정의 의식이 양심이다”라고 말하면서 “거기서 자신의 생각이 서로 고소한다든지 변명하다든지 한다” 고 하였다. 그리하여 양심은 도덕적 자기의식으로 간주된다.

양심이 법정 안에서 고소하는 인격(원고)내지 판가름하는 인격(재판관)과 고소당하고 판가름 당하는 인격(피고)이 각각 다른 인격이지 않으면 불합리하다고 하였다. 따라서 양심의 활동은 시간적 질서에 따라 행위(결심)이전은 경고하는 양심이며 행위중 원고와 변호사가 등장하는 양심, 즉 가책을 깨닫고 변명하는 양심이고 행위 후는 재판관의 판결로서 나타나는 양심, 즉 후회를 깨닫는다든지 마음의 평안함을 깨닫는 양심이라고 하였다.

헤겔 또한 양심은 우리 자신의 행위가 도덕적인 의무에 적합한지의 여부를 ‘안다’는 것이라고 했다. ‘안다’는 것은 자기와 ‘함께’ 타자와 ‘함께’ 절대자와 ‘함께’ 아는 것이다. 양심은 이러한 세 가지를 아울러 지닌다는 점에서 ‘전적으로 안다’는 것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성경사전에서도 양심은 ‘사물의 선악을 구별하고 판단하는 마음의 기능이나 도덕적 정서 또는 하나님의 뜻을 통찰하고 죄를 책망하며 선을 추구하려는 선한 능력’이라고 말을 한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행 24:16)”라고 말한 것이다. 따라서 사도행전 23장 1절에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우리 교단의 모든 지도자를 비롯한 구성원 모두가 옳은 판단의 기준이 되는 양심을 가지고 행동 할 때만이 우리 교단이 바르고 든든하게 서 갈 수 있다는 것에 의심할 바가 없다.

한편 이러한 양심과 판단과 행동은 절대로 주관적이지 않고 지극히 객관적이고 합리적이어야 한다.
작금의 우리교단에서 갈등을 빚고 있는 사안들에 대하여 말하고 행동할 때 역지사지하며 옳은 양심에 스스로 호소하였는지를 먼저 깊이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렇게할 때만이 갈등을 해결하고 하나로 나아가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올해는 개띠의 해이다. 이와 관련해서 3가지 개(견)를 버려야 한다는 말이 있다. 선입견과 편견과 참견이다. 우리가 많은 얘기를 들을 때에 말하는 사람의 인격이나 입장을 고려하더라도 그 판단은 자신을 속이지 않는 객관적인 양심에 따라 해야 한다. 이것은 오랜 사회적 경험과 체험을 통해서 얻어진 가치라고 여겨진다.

용서와 화해는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낮은 자세로 상대를 배려하고 적극적으로 호소함으로서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여겨진다. 우리 각자에게는 나름의 자존심이 있다. 그러나 그 자존심은 지혜를 지켜나가지 못한다는 것도 깨달아야 한다. 그동안 교단 일을 해오면서 한 순간 한 순간 고비를 넘겨 가면서 가장 아쉽게 느껴 왔던 일이기에 감히 이렇게 말 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교단은 모든 것을 용서하고 화해하여 교단을 사랑하고 그 위상을 새롭게 할 때다. 종교 활동과 신앙생활 하는데 원활하지 않은 환경에 얽매이지 말고 또 교단이 부흥 성장하는 일에만 매진하지 않으면 위기는 현실로 다가온다는 것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우리 성결가족 구성원 모두는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는 옳은 양심의 바탕에 모든 일에 순발력 있고 지혜롭게 판단하고 결단하는 리더십을 발휘하며 원칙과 소신이 있는 적극적인 행정력이 뒷받침 되어 양심과 판단과 행동의 옳은 가치로 우리 교단의 위상을 새롭게 하고 무궁한 부흥과 발전으로 거듭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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