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교는 지식의 논리(신학)를 기반으로 해야 하지만 성령의 역사하심, 허락하심으로 이뤄지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설교자들의 자부심이다”(제1103호 애오개)는 글의 내용은 공감이 가는데 “설교의 자리는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삶을 살아온 사람이라야 감당할 수 있는 자리이다”라는 주장은 “한국교회의 현실을 외면한 채 설교자들을 너무 감싸준 것이 아니냐”는 어느 분의 지적이 있었다.

▨… 아팠다. “모든 설교자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을 살아왔고 살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느냐?”는 질문 앞에서 수백 수천 번 설교의 자리를 감당했었던 자신을 돌아볼 때 “그렇다”라고 당당하게 답할 수 없어 괴로웠다. 애오개의 내용에 대해 공감이나 불만이 종종 피력되지만 이번만큼 아픈 적은 없었다. 그것은 송곳에 가슴이 찔리는 듯한 통증이었다.

▨…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삶을 살아온, 또 살고 있는 사람만 설교의 자리를 감당할 수 있다는 말은, 지적해주신 분의 표현대로, 어쩌면 모든 설교자의 목을 옭는 올가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땅의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특히 우리 성결교회의 설교자들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삶을 살고 있다. 적어도 그렇게 살려고 피나는 노력은 하고 있다. 비록 인간의 한계에 갇혀 때로는 좌절해 쓰러지기도 하지만.

▨… 우리 성결교회에는 그 삶 자체로 십자가의 진리를 증언하는 목회자들이 많이 있다. 이분들에게 있어서 설교는 언어나 논리가 아니다. 그 삶 자체다. 거리가 곧 교회인 목회자도 있고 장애우 돌봄이 목회인 목사도 있다. 앗시시의 프란치스코처럼 가난을 감내하려 결단한 교역자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최저생계비조차 욕심내지 않은 삶에 무슨 조건이 더해져야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삶이 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 우리 교단의 어느 설교자가 고백했다. “설교의 내용 앞에서 설교자 자신이 스스로 떳떳할 수 없는 존재라는 점에서 설교자는 당황스럽다. …설교자는 결국 성령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다. 성경을 완전하게 해석해내지 못했지만, 청중을 완전하게 사로잡지 못했지만, 스스로 말씀에 완벽하게 서있지는 못하지만, 성령이 그 부족한 부분을 채우신다는 믿음이 절실하게 요청된다.”(정용섭·세상, 인간, 하나님) 설교, 참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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