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교회, 성결교회 발상지에 표시석 설치
종로 84번지 염곡 복음전도관서 성결교회 시작 의미 되새겨

한국성결교회는 110년 전인 1907년 5월 경성 종로 염곡(현 서울 종로2가)의 복음전도관(현 중앙교회)에서 시작되었다. 성결교회가 시작된 이곳에 그 역사적인 기원을 알리는 표시석이 설치됐다.

중앙성결교회 발상지 표시석
성결교회의 모교회인 중앙교회(한기채 목사)가 교회 창립 110주년을 맞아 지난 5월 24일 ‘종로 84번지’ 성결교회 발상지에 중앙교회의 시작을 나타내는 ‘표시석’을 세운 것이다.

또 초기 성결교회 교인들이 북치고 장구치며 노방전도를 했던 옛 전도행사를 재현하며 성결교회 전통을 시민들에게 알렸다.

중앙교회 표시석 설치 행사가 열리던 날, 250명의 중앙교회 성도와 옛날 한복을 차려입은 청년들은 무교동 중앙교회 유적지에서 표시석 설치 장소까지 약 1.5km를 이동하면서 “믿기만 하오! 예수가 생명이라오!”를 외치며 옛 전도풍경을 재현해 시민들의 눈길을 끌었다.

초창기 성결교회 전도 재현 퍼레이드

최근 교단 총회에서도 헌법 전문 중 ‘전도관’을 ‘복음전도관(현 중앙교회)’로 개정해 ‘성결교회 기원’을 분명히 했다. 옛 것에서 새로운 것을 찾으려는 성결교회의 멋스러움이 돋보인다.

성결교회(중앙교회)의 발상지를 알리는 표시석이 설치된 곳은 ‘종로 84번지’ 인도 위다. 보도블럭 2개 크기에 불과하지만 “이곳이 성결교회의 시작이다”라는 것을 분명히 알린 것이다.

이번 표시석 행사는 성결교회의 뿌리와 역사를 확인하고 첫 교회가 어디에서 출발했는지를 표시함으로써 성결교회 역사와 신앙 계승을 위한 또 하나의 노력이다. 모교회인 중앙교회 한기채 목사와 성도들은 교회의 역사와 시작을 확인하는 감격을 누렸다.

전 총회장 여성삼 목사와 목창균 서울신대 전 총장, 정상운 전 성결대 총장, 김관상 CTS사장 등이 참석해 중앙교회 창립 110주년과 표시석 설치를 축하했다.

한기채 목사는 “이곳에서 중앙교회가 출발했고 기성과 예성, 서울신대와 성결대가 시작됐다”며 “한국인에 의해 자생한 성결교회가 오늘날 중앙교회를 시작으로 전 세계로 뻗어가는 큰 부흥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했다.

직전 총회장 여성삼 목사는 “오늘 성결교회의 뿌리를 찾아서 행복하다”며 “김상준, 정빈 두 사람에 의해 시작된 염곡 복음전도관이 지금은 전 세계를 복음화하는 교단으로 성장했다”고 축하했다.

목창균 전 서울신대 총장은 “성결교회의 뿌리를 확인하고 시작될 때의 초심을 확인하는 자리였다”고 평가했으며 정상운 전 성결대 총장은 “신앙 선조들의 복음전도의 사명을 되새기는 귀한 자리였다”고 말했다.

앞서 교단도 성결교회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그 정확한 위치를 찾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오다가 2007년 본지가 성결교회 100주년 기획 성결실크로드(제592호, 2007년 1월 27일자 5면, 황승영 기자) 기사로 그 출발점을 처음 알렸다.  

성결교회는 110년 전 현재의 종로2가 일대(구 관철동) 염곡에서 시작되었다. 이곳은 소금파는 상전이 있어서 소금골로 불렀다. 소금골은 1914년 동명 개정에 따라 관철동으로 편입됐다.

종로2가 75번지와 관철동 15번지 사이에 소금전과 시전들이 위치해 있었으며 지금은 노점과 대중음식점, 유흥점 등 식품접객업소가 밀집해있다.

당시의 염곡 복음전도관이 위치한 종로는 지금처럼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번화가였다. 폭이 좁고 납작한 기와행랑이 길게 늘어서있고 그 옆에 허름한 초가가 빼곡히 들어차 있던 종로의 거리는 노방전도에 안성맞춤이었다.

당시에도 종로는 사람들의 통행이 많고 양반들과 서민들의 삶이 교차하는 곳이었다. 성결교회는 바로 전국의 모든 길이 통하고 정보와 사람이 모였던 곳에서 시작된 것이다.

1907년 김상준, 정빈 두 젊은이와 카우만 선교사 부부, 길보른 선교사 등 5명은 5월 중순경 종로 염곡에 전도관을 얻었다. 최초의 전도관은 협소한 한옥으로 셋집이었다. 50~60명이 앉을 수 있는 규모였으며 겨우 창문으로 밖을 내다볼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들은 바로 노방전도에 나섰다.

당시에는 보기 드물었던 전도용 소책자를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이후 카우만이 떠나고 5월 30일 전도관 창립집회에서 5명의 구도자가 나왔으며 일주일에 8번 집회가 열릴 정도로 활발한 전도와 집회가 이루어졌다.

복음전도관이 급속히 부흥하자 카우만 부부는 새로운 건물을 구하기 위해 1908년 9월 9일 다시 서울을 방문해 구리개(을지로 2가)에 전도관을 새로 얻었다. ‘구리개’란 명칭은 흙이 붉고 질은 ‘구리와 같은 고개’라는 뜻이다.

구리개 전도관은 중국사람에게 월 20달러를 주고 6개월간 임대한 건물이었지만 이곳에서 1908년 겨울 대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양반의 도시인 서울은 열광적인 부흥운동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이런 냉랭한 분위기 속에서 성령의 바람이 일어났다.    

지금도 거리에서 악기를 동원해 노방전도를 하면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데 그 옛날 북 치고 나팔 불며 전도하는 행렬은 ‘차지도 덥지도 않았던’ 서울을 변화시키는 성결교회 부흥의 원인이었다.

1909년 봄이 되자 복음전도관은 또 다시 건물 문제에 봉착해 종로 무교동의 조선식 기와집을 구입했다. 이후 무교정 복음전도관은 기존 건물을 헐고 1912년에 600명을 수용하는 당시 꽤 큰 건물을 지었다.

이곳 무교정 복음전도관은 1948년 중앙교회로 명칭을 바꾸었다. 이곳 무교동에서 성결교회는 복음전도관이란 모습을 벗고 비로소 성결교회로 옷을 갈아입었다.

경성성서학원(현 서울신학대학교)도 1911년 3월 이곳에 설립되었으며 수많은 지도자를 양성했다.

이명직의 ‘성결교회 약사’에는 1911년 3월 경성 무교정 복음전도관 안에 임시로 성서학원을 설립하고 토마스 선교사가 원장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서울신대는 이것을 경성성서학원의 공식적인 시작으로 보고, 1911년을 창립된 해로 간주하고 있다. 후에는 중앙교회 홍대실 권사의 헌신으로 성결대학교도 세웠다.

중앙교회는 또 모교회답게 1915년 광주교회(경안)를 시작으로 한우리교회(구 독립문교회), 영광교회(구 체부동교회) 등 68개의 지교회를 세웠으며 지교회가 개척을 한 경우까지 포함하면 100여 개 이상의 교회를 설립하는 교단 부흥의 산파 역할을 했다.

또 교단의 대부흥사 이성봉 목사와 이만신 목사 등이 담임을 맡으며 성결교회의 중심인물이 거쳐가는 관문 역할을 감당했다.

무교동 성결교회 희년기념관
중앙교회 표시석 설치 개막식에 앞서 무교동 교회유적지(성결교회 50주년 희년기념관, 중앙교회 구 예배당)를 탐방하는 행사가 열려 한기채 목사와 성도들이 함께 중앙교회의 역사를 눈으로 확인했다.

무교동에 중앙교회가 운영될 당시 교회에 출석했던 어르신들은 옛 추억을 더듬으며 당시의 신앙생활을 설명하기도 했다. 무교동 교회유적지는 과거 우리 교단과 예성의 총회본부와 중앙교회 예배당으로 사용되었다. 현재는 카페와 음식점 등이 들어서 있다.

당시 성결교회 희년기념관 건립은 동양선교회가 경비의 절반을 지원하고 나머지 절반은 한국성결교회가 부담하는 사업이었다. 때문에 성도들의 적극적인 동참이 요청되었다.

한국 성결교회는 처음에 세례교인 1인당 100환씩 모금하기도 했으나 형평상 지역별로 차등을 두어 많게는 470환, 적게는 190환씩 부담하도록 했다. 총 예산은 3,000만 환으로 동양선교회의 원조(1,500만 환)와 전국교회(500만 환) 및 독지가의 협조(500만 환), 중앙교회(500만 환)가 부담하게 됐다.

무교동 12번지에 세워진 희년기념관은 1957년 9월 1일 기공식을 가졌으며 1958년 12월 1일 준공됐다. 이 기념관은 2층(총 378평)이었고 1층은 총회본부가, 2층은 중앙교회가 사용했다. 이후 성결교회 분열기에 기성과 예성 총회본부, 중앙교회 간판이 나란히 걸리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1974년에는 고 이만신 목사가 중앙교회의 청빙을 받아 부임했다. 이 목사는 부평신촌교회에서 받은 퇴직금으로 예성이 서대문에 새 총회본부를 얻게 했다. 중앙교회는 날로 늘어나는 신도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1978년 당회에서 교회 이전을 결의해 1980년 종로6가에 현재의 중앙교회 성전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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