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죽인 원수 “하나님 때문에 용서”
이판일 장로 등 임자 진리교회 48명 신자 순교
아들 이인재 목사, 원수 용서하고 사랑으로 품어

1950년 10월 5일, 마지막까지 원수를 사랑했던 임자 진리교회 이판일 장로와 48인의 신자는 끝내 순교했다. 그 후 이판일 장로의 아들 이인재 목사는 아버지의 농지 1000평을 팔아 교회당을 세우고 아버지를 죽인 사람들을 용서와 사랑으로 품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이 드라마틱한 순교와 용서의 이야기는 성결인과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큰 감동을 전하며 거룩한 순교신앙을 가르치고 있다.

평신도 지도자 이판일 장로
이판일 장로가 예수를 믿게 된 계기는 순교사 문준경 전도사의 전도 때문이었다.

이판일 장로는 어느 날 마을 아이들과 아낙네 30여 명이 어우러져 노래하는 모습을 보았다. 환한 얼굴의 중년부인은 고운 음성으로 힘차고 구성진 노래를 부른 후 전도설교를 하여 모인 무리들에게 예수를 믿게 하는 것이었다.

그 중년부인은 당시 경성성서학원 신학생 문준경 전도사였다. 1932년 문 전도사는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해 첫 실습기간 복음의 불모지인 임자도를 찾아 노방전도로 임자교회(현 진리교회)를 개척했다.

어느날 이판일 장로가 글을 읽고 있는데 문 전도사가 방문했다. 이판일 장로는 문 전도사를 친절히 맞으며 쪽 복음서 한 권을 선물 받았다. 진리에 대한 탐구심이 강한 이판일 장로는 문 전도사와 진솔한 대화를 통해 생명의 복음을 접하고 얼마 후 예수를 구주로 영접했다. 문 전도사는 신앙생활의 필수지침을 알려주었다.

이판일 장로는 즉석에서 주초를 끊어버리기로 결단하고 담뱃대를 부러뜨려 봉초와 함께 아궁이에 던져버렸다. 또 조상대대로 내려오던 조상제사를 철폐하여 제사 기물도 모두 아궁이에 던져 태워버렸다. 그 주일에 이판일 장로와 그의 아우 이판성 집사의 온 가족이 예배에 참여했다.

1934년 2월 2일 이성봉 목사의 집례로 여성 5명과 함께(어머니 남구산 포함) 진리교회 최초의 세례교인이 됐다. 이후 여성 3명과 함께 진리교회 최초의 집사가 되었고 1946년 7월에는 진리교회 최초의 장로가 되었다.

순교의 길
진리교회가 날로 부흥하던 1950년, 한국전쟁의 발발로 인해 임자면 진리는 공산치하에 놓인다. 이후 9월 24일 진리교회 역시 간판을 떼이고 출입문을 봉쇄당했다. 하지만 이판일 장로는 동생 이판성 집사를 비롯한 성도들과 함께 밀실예배를 드리다가 체포됐다.

그들은 목포 정치보위소로 압송되어 곤욕을 치루었지만 이판일 장로를 알아본 안식교 교인으로 추정되는 정치보위소장의 취조를 받고 석방됐다.

그러나 이판일 장로 형제는 걱정하며 만류하는 사람들을 뿌리치고 “늙으신 어머님과 교우들을 버린 채 나만 살 수 없다”며 순교의 각오로 진리교회가 있는 임자도로 돌아갔다.

이 때 문준경 전도사도 백정희 전도사와 성도들을 위해 증동리교회로 갔고 이판일 장로는 성도들을 보호를 위해 임자도 행을 택한 것이다.

석방된 지 일주일째 되는 10월 4일 저녁, 이판일 장로를 비롯한 48명의 신자들은 밀실예배를 드렸다. 그런데 갑자가 총과 몽둥이, 죽창을 든 공산군이 들이닥쳐 성도들을 포승줄로 포박한 뒤 형장으로 끌고 갔다.

그날 밤 이판일 장로는 늙으신 어머니를 등에 업은 채 조카의 손을 잡고 3km를 걸어 다음날 새벽, 공산당원들이 미리 파놓은 갯벌 백사장 구덩이 처형 장소에 당도했다. 

순교의 장소에 선 이판일 장로는 “주여, 이 부족한 종과 우리 모두의 영혼들을 받아주소서, 또한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라고 최후의 기도를 드렸다. 그 모습을 지켜본 공산당원 하나가 몽둥이로 이판일 장로의 뒷머리를 쳐서 그를 구덩이로 떨어뜨려 죽였다.

이판일 장로의 죽음과 동시에 “찔러라”는 외침이 들리고 공산군의 죽창에 의해 47명의 신자들이 모두 죽임을 당했다. 그 뒤 이판성 집사의 딸 이완순(여, 9세)도 가족을 찾다가 공산군에게 죽임을 당해 갯벌에 가매장됐다.

그렇게 이판일 장로 등 진리교회 48명의 신자는 순교의 길을 갔다. 이판일 장로가 순교하던 날 그의 영적 스승인 문준경 전도사도 순교했다.

원수도 도리어 사랑
당시 목포에 거주해 화를 면한 이판일 장로의 장남 이인재 목사는 10월 30일 국군과 함께 고향에 돌아왔다. 이인재 목사는 가족들이 모두 처참하게 죽었음을 확인하고 원수들을 잡아 야산공터 처형장에 세웠다.

그런데 원수들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아버지 이판일 장로의 음성이 귓가에 들렸다.

“아들아, 내가 그들을 용서했으니 너도 그들을 용서하라”

결국 이인재 목사는 “당신들이 죽인 아버지가 당신들을 용서했으니 나도 당신들을 용서합니다. 이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라고 말하며 원수들의 결박을 풀어주었다.

이후 이인재 목사는 1954년 32세의 늦은 나이에 서울신대에 입학해 신학을 공부한 후 여러 교회를 거쳐 모교회인 임자 진리교회에 부임해 9년간 시무하고 원로로 추대됐다. 현재 진리교회에는 이인재 목사의 삼남 이성균 목사가 지난해 부임해 목회하고 있다.      

원수의 영혼을 위해 용서를 빌었던 아버지 이판일 장로의 고결한 믿음의 대를 이어 아들 이인재 목사는 자기의 가족과 성도를 살해한 폭도들을 사랑으로 용서함으로써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한 평가로 인해 이인재 목사는 이정근 원로목사(유니온교회)가 설립한 원수사랑재단에서 2008년 ‘원수사랑상’을 받았다.

이인재 목사는 2009년 2월 20일 금요일 새벽 목포 한국병원에서 그가 바라던 그 곳 아버지 이판일 장로가 계신 주님 품으로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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