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스스로 있는 자

이성훈 목사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시는 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전혀 판단하시지 않는 분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를 외모를 보시고 판단하시지 않는다는 말씀이지 우리를 판단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판단하십니다. 그리고 그 판단의 기준은 우리의 내면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의 중심을 보신다고 하실 때 우리의 중심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이 모세를 만나주시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 상황 속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묻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고 답변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무척 흥미롭습니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를 히브리어로 “에히예 아쉐르 에히예”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아쉐르’(that)를 제외하고는 하나님을 표현하는 단어는 ‘에히예’(‘존재하다’) 단 하나뿐입니다.

유대인에게 이름은 그 사람의 정체성을 담아냅니다. 아브라함이라고 하는 이름에는 ‘그가 열국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고, 노아라고 하는 히브리어 이름에는 ‘안식하다’라고 하는 의미가 담겨 있듯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이름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고 하는 답변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존재한다’(히.에히예)라고 하는 동사로 표현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은 쉬임없이 움직이시고 활동하시는 속성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구나” 하고 단정하고 정의 내리시는 순간, 하나님은 더 이상 그 분이실 수 없다는 의미도 포함됩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은 이렇게 일하실 거야” 라고 쉽게 단정해서도 안되는 이유입니다.

베드로가 빈 그물로 들어와 그물을 물에 씻고 있을때 주님께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합니다. 저는 물고기의 생태를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물고기를 잘 낚을 수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와 같은 문외한도 물고기가 찬물과 더운물이 만나는 곳에 많이 모인다는 것쯤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물고기 잡는 데는 선수입니다. 아니 전문가라는 표현이 더 어울립니다. 내세울 수 만한 학벌이나 재산이 없는 그에게 있어서 오직 그에게 있는 것은 물고기 잡는 기술뿐입니다. 만일 누군가가 베드로 앞에서 물고기 잡는 것에 대해서 왈가왈부한다면 아마도 그는 성격상 견디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한 그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깊은 바다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는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만…’이라고 하는 말 속에는 “깊은 곳에 간다고 해서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하는 나름의 베드로의 생각과 감정이 엿보입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다시 한번 보겠다며 주님 말씀에 순종합니다. 이는 베드로가 순종하기로 해서가 아닙니다. 우리 인간의 본질 자체가 하나님을 부정하려는 죄성이 있는데 이것이 어찌 가능하겠습니까! 그의 순종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 안에서 듣고 그 분께 집중함으로써 생겨난 은혜(눅 5:3)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중심’이란 우리가 늘 하나님께 주파수를 맞추어 놓고 그 분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고자 하는 자세입니다.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은 목회자가 되고 싶습니다. 정말입니다. 하루 하루를 대충대충 살아갈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 분께  집중하고 싶습니다. 정말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중심을 보시고 언제든지 거리낌 없이 말씀하시고 또 그 말씀에 순종하면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기도가 모든 이들의 기도가 된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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