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피조물 되는 은혜 누리자

이성훈 목사
본래 우리의 모습은 하나님 보시기에 참 좋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며 좋다고 하셨을 때 사용했던 말은 히브리어의 ‘토브’입니다. ‘토브’라고 하는 히브리어는 전에도 언급하였듯이  단순히 ‘좋다’의 의미를 넘어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서 생각과 행동 그리고 삶 전체가 완벽에 가까우리만큼 참으로 아름다웠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의 죄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과는 상관없는 존재로 전락했습니다. 정말로 우리는 악하고 추악한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겉으로는 그럴 듯 해 보입니다만, 속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과는 전혀 거리가 먼 존재로 전락하였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과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은 전혀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다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셨습니다.

모세의 삶이 그렇습니다. 그는 사람을 죽이고 미디안이라고 하는 곳에 와서 숨어살았습니다. 이는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후 하나님을 피해 있는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누가 보아도 이제 그의 인생은 하나님의 영광과는 전혀 상관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끝날 수 밖에 없는 삶이었습니다.

그러한 모세를 하나님은 그냥 강 건너 불 보듯이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의 첫 아들의 이름을 보더라도 이 생각은 틀리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세의 아들 게르솜은 히브리어로 ‘게르’와 ‘솜’이란 말이 합쳐진 말입니다. 히브리어 ‘게르’란 말은 ‘정 붙이고 살 곳 없이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는 사람’ 즉 ‘이방인’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히브리어 ‘솜’은 ‘샴’의 또 다른 형태로서 ‘거기에서’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정리하자면 ‘거기에서 살 곳 없이 떠돌아다니는 사람이었다’하는 의미였습니다.

‘거기에서’라고 하는 ‘거기’란 당연히 애굽을 가리킵니다. 자신의 아들 게르솜이라고 하는 이름을 통해 자신이 애굽에서 떠돌아다니는 이방인이었다고 하는 고백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세의 고백은 우리로 하여금 아브라함과 하나님과의 언약을 생각나게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13] ...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히.게르)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창 15:13) 라고 하셨습니다.

이 예언이 정확하게 성취되었으니 당연히 그 다음에 이어지는 14절의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는 약속도 분명히 성취될 것이라는 소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모세는 애굽에서의 고난이 하나님의 예언의 성취였음을 고백하고 이제부터 나타나게 될 하나님의 구원의 출애굽의 역사를 소망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그가 그의 믿음대로 출애굽 역사의 중심에 설 수 있었던 이유가 됩니다.

우리 인간은 모세의 전반부 인생과 같습니다. 아무런 가능성도 없고 희망도 없이 그저 살다가 갔어야 할 인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살다가 끝나는 우리 인생을 그냥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한 번 왔다가 이름조차 기억되지 못하는 먼지 같은 인생이 되도록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요 복음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얼마나 크고 감사한지 이제부터 우리는 살아야 할 목적과 의미를 오직 하나님께 두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누구이든지 간에 상관없습니다.

우리의 죄가 얼마나 크든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복된 인생을 살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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