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여우를 잡아라”

손동식 목사
설교의 왕자, 스펄전은 언젠가 사소한 작은 것이 설교를 망쳤던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스펄전은 한 집회를 인도하면서 자신의 작은 키 때문에 높은 강단 너머로 회중을 보기 위해 발 디딜 무언가를 교회에 요청했다.

교회에서는 방석을 가져다 주었는데, 스펄전은 그 방석 위에서 중심을 잡느라 애를 쓰며 설교하던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토로한다.

“아뿔싸! 이 사소한 것들이 우리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생각의 연결을 끊어버리고 우리의 영을 혼란에 빠지게 만듭니다. 물론 우리는 그런 하찮은 것들을 개의치 않고 극복하는 것이 마땅합니다마는 우리의 마음으로는 원이로되 육신이 연약하니 어쩌겠습니까? 그런 지극히 사소한 일들 때문에 정신이 영향을 받는 것을 보면 정말 놀랍습니다.”

따라서 지혜로운 설교자는 아주 사소한 것에도 주의를 기울인다. 특히 강단에 올라가기 전 일어나는 사소한 작은 일들이 설교의 정신을 산만하거나 흐트러트리지 않도록 불필요한 변수들을 제거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사소함에 대한 주의는 설교 전 강단 아래 뿐 아니라 설교 강단 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이러한 사소함에는 설교자의 자세나 제스처도 포함된다. 어떤 설교자는 강단에서의 어색한 제스처나 자세 때문에 회중이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스펄전은 설교의 내용에 부합하는 몸짓과 제스처를 설교를 해설하고 돕는 ‘일종의 주석’이며 ‘실질적인 해석’(practical exegesis)으로 여겼다. 전달하는 설교의 몸짓은 그 전하는 말과 조화를 이루어어야 한다.

설교자가 어색한 제스처나 자세를 취하는 요인에 대해 스펄전은 몇 가지로 분석했다.  

첫째, 천성적으로 외모와 움직임이 매우 어색한 사람들이 있다. 천성적인 분위기나 태어난 고향, 혹은 성장환경이나 교육 환경으로 인해 어색함이 몸에 깊이 배여있는 경우이다. 

둘째, 강단 자체가 사람을 어색하게 만드는 측면이 있다. 스펄전은 설교자의 몸을 거의 가리는 전통적인 강단을 ‘끔찍한 발명품’으로 여겼다. 왜냐하면 그런 강단은 설교자를 ‘살아있는 반신상(半身像)’으로 만들어 몸동작을 어색하게 만들 뿐 아니라 설교의 전달에도 효율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셋째, 두려움 때문에 어색해지는 경우도 많다. 스펄전은 이런 문제의 효과적인 극복 방안으로 설교자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의 인식과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과 함께 보다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조언한다.

“연습이 큰 치유책이 될 것입니다… 설교자가 사람들에게 익숙해지면 편안히 강단에 서게 되고, 편안하기 때문에 아주 안락한 느낌을 갖게 되고, 그의 손이나 발 등 그의 신체의 부분들에 대해서도 아무 생각이 없어지게 됩니다.”

넷째, 설교자의 사소한 습관 때문에 특이한 몸짓을 하는 경우도 있다. 간혹 어떤 설교자는 아주 독특한 제스처나 습관이 너무나 몸에 깊이 배어 있어 그것이 없이는 도저히 설교를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이 설교자는 자세와 제스처를 어색하게 만드는 요인들에 주의하고 자연스러우며 품위있는 태도의 함양을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설교자가 행하는 일의 성격이 그것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스펄전은 말한다.

“우리가 강단에 올라가는 것은 지극히 엄숙한 일을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태도 역시 그 엄숙한 일에 어울리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지혜로운 설교자는 작은 파리 한 마리가 몸과 영혼을 치유하는 복음의 약제(藥劑)를 망치지 못하도록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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