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자마마’로 자칭하며 사기 행각 … 부와 권력 누려
박근혜 대통령 내세워 최씨 일가 대이은 국정농단
총회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위원장 김철원 목사)는 최근 최태민의 사이비종교 행태를 담은 연구 보고서를 전국에 배포키로 했다. 이대위의 연구 보고서를 중심으로 사이비 교주 최태민의 행각을 정리했다.
최태민 씨의 호칭은 목사가 아닌 교주로 불러야 한다는 것이 중론이다. 목사안수를 받았다고 주장했지만 제대로 된 신학교육을 받지 않았고 불교와 천주교 등 여러 종교를 섭렵했기 때문이다. 또한 1971년에는 영세교라는 사이비 종교를 만들고 스스로를 ‘태자마마’와 ‘칙사’로 불렀다는 점에서 교주라는 단어가 더 적합하다.
최태민이 창립한 영세교는 불교와 기독교, 천주교를 복합한 종교로 영혼합일법을 주장했다. 영세교는 1973년 5월 13일 대전일보에 실린 광고에서 ‘불교에서의 깨침’, ‘기독교에서의 성령강림’, ‘천도교에서의 인내천’ 등을 언급하며 “고통을 당하고 계시는 난치병자와 모든 재난에서 고민하시는 분은 즉시 오시어 상의하시라”고 소개했다. 같은 해 7월에 뿌려진 전단에서는 영세교 칙사관이라는 명의로 태몽, 현몽, 기도, 신유 등의 상담을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에는 스스로를 ‘칙사’, ‘태자마마’로 자칭하며 사이비 교주 노릇을 했다.
최태민이 박근혜 대통령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74년 육영수 여사가 피살된 후였다. 최태민은 당시 박근혜 영애에게 접근해 “육영수 여사의 영혼이 나에게 빙의되었다”며 육영수 여사의 표정과 음성을 그대로 재현했다고 한다. 이후 박근혜 영애와 최태민은 굉장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실제로 최태민은 주변 목회자들에게 “나와 박근혜는 영적 부부”라고 주장했으며 주한미국대사관 보고서에도 “최태민이 박근혜 후보의 인격 형성기에 몸과 마음을 완전히 지배했고, 그 결과로 최태민의 자녀들이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다”고 보고했다.
최태민이 목사를 사칭한 것은 1975년 4월부터이다. 당시 최태민은 영세교의 간판을 내리고 대한예수교장로회 종합총회에서 10만 원을 주고 목사안수를 받았다. 이후 1976년 대한구국선교단을 창설하고 총재가 되었으며 박근혜를 명예총재로 추대했다.
주류교단의 목회자들도 최태민을 경계하라는 교단 지도부의 권고에도 아랑곳없이 단체에 동참했다. 현대종교 1988년 6월호는 최태민이 1975년 주도한 육영수 여사 추모예배에 기라성 같은 기독교계 인사들이 참석해 순서를 맡았다고 밝혔다.
이후 최태민은 박근혜 영애를 등에 업고 온갖 비리로 부와 권력을 누렸다. 중앙정보부가 1977년 조사한 수사자료에는 비리혐의 44건에 3억 1700만 원 탈취, 여성 스캔들 12건 등이 보고되었다. 최태민은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 후에는 노골적으로 비리를 저질렀다.
영남대 운영, 육영재단 등에 깊숙이 관여하면서 최태민 일가는 더욱 많은 부를 쌓게 된다. 1990년 박근혜 영애의 형제인 박근령 씨와 박지만 씨가 노태우 대통령에게 “박근혜가 최태민에게 최면이라도 걸린 듯이 정신을 못차리고 있으니 구해달라”고 탄원서를 보낼 정도였다.
최태민은 1994년 5월 만성신부전증을 앓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러나 최태민의 뒤를 이어 최순실을 비롯한 최 씨 일가들은 20년이 넘은 지금까지 박근혜 영애의 몸과 마음을 지배하며 국정을 농락하고 한국사회를 혼란에 빠뜨렸다.
결국 한 사이비 교주의 사기행각이 박근혜 정부의 국정 농단의 시발점이 된 것이다. 그러나 한국교회도 권력 지향의 모습을 보이며 일부 동참했다는 점에서 국정 농단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과거 최태민에게 부역했던 행동에 대해 회개하고 앞으로 사이비종교에 국정이 좌우되지 않도록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구하는 일이 지금 한국교회가 해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