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는 ‘참여의 예술’이다

강의 시간, 신학교 학생들의 발표할 설교문을 살필라 치면 그 내용과 함께 설교문에 몇 개의 물음표가 달렸는가를 본능적으로 살피게 된다. 그리고 거의 모든 문장이 처음부터 끝까지 “~~습니다”라는 어미로 끝나는 설교문을 보면 꽤나 지루한 설교가 될 것이라 직감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예측은 거의 빗나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런 설교들은 청중과의 소통이나 호흡없이 일방적인 자기 선포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설교는 설교자의 메시지 선포이다. 그러나 내용에 있어서 설교자가 전적인 주도권을 가질지라도 설교자가 강단에 서는 순간, 그것은 회중을 전제로 하는 상호적인 성격을 띈다. 따라서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지나치게 사로잡힌 나머지 설교의 기본적 성격이 말함과 들음이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아니된다.

크래독(F. B. Craddock)은 이러한 인식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청중이란 소리를 내던 조용히 있던 간에 설교에 적극 참여하는 자들이다. 설교 신학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자의 입에 있다고 보던 청중들의 귀에 있다고 보던 간에 분명한 사실은 그 양자가 대화한다는 것이다.”

역사상 많은 뛰어난 설교자는 언제나 설교가 선포라는 사실과 또한 그것의 전달이 상호적인 것임을 간파했다. 예를 들어 스토트는 “참된 설교는 언제나 대화적인 것(true preaching is always dialogical)"임을 강조한다. 여기서 대화적이라는 것은 문자 그대로 설교자가 청중과 어떤 문제를 토론하거나 직접적으로 질문을 던지고 답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설교자와 그의 청중 사이에 일어나는 무언의 대화"를 의미한다.

스토트는 종종 그의 설교의 서두에서 회중에게 질문을 던짐으로서 설교를 전개해 가곤 했다. 스토트는 이러한 대화적 설교를 체스에 비유한다. 곧 체스 전문가는 자신의 말을 움직일 때 그것에 대해 상대방이 어떻게 말을 움직일지 미리 예측하고 그것에 대응할 준비를 갖춘다. 이와같이 설교자는 효과적인 설득과 참여를 위해 자신의 설교에 대한 청중의 반응을 예상하고 그 반응에 응답할 수 있도록 예측하고 대비해야 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이러한 대화적 설교는 회중과의 상호작용을 위해 크게 두 가지 도구가 사용된다. 첫째는 수사학적 질문으로 논지나 혹은 대지의 전환에서 질문법을 통하여 전환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특정한 제목으로 설교를 전개할 때, 그 대지의 전환 때마다 단정적인 “~습니다”라는 말보다는 “왜 그렇습니까?”, 혹은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같은 질문법을 통하여 주요한 대지를 전환하는 것이다. 스누키안(D. Sunukjian)은 설교의 전환에서 이러한 수사학적 질문은 회중으로 생각하도록 자극하며, 메시지에 집중하도록 돕는다고 역설한다.

대화적 설교를 위한 두 번째 도구는 예상반론이다. 스토트는 회중은 저마다 각자의 여과기를 통해 설교를  듣기 때문에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에 대하여 일어날 수 있는 청중의 질문과 반론을 예상하고 그것들을 추가적으로 설명하고 해명하는 작업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이러한 작업은 비록 고통스럽지만 필수불가결한 것이며, 권위적 설교가 수반할 수 있는 저항감을 감소시킬 수 있다는 측면에서 절대적으로 유익하다.

혹자는 이 시대의 코드를 ‘소통과 대화’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러한 원리는 이 시대 뿐 아니라 강단에도 적용된다. 로스칼조(C. Loscalzo)는 말한다. “포스트모던 세계는 기꺼이 생동적인 대화상대자가 되려는 강단을 요구하고 있다.” 회중은 당신의 설교를 들을 때, 당신과 이야기 하기 원한다. 그들을 초대하고 참여시키고 대화하라. 귀를 쫑긋 세우고 들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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