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lieve in Preaching!

설교란 흔히 '말'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설교란 흔히 ‘설교 원고의 내용’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설교행위 속에서 설교는 ‘달변’이상이며 ‘좋은 내용’ 그 이상이다. 기이하게도 내용은 좋은데, 성도들의 머리에만 멈추고 조금도 마음에 감동을 주지 못 하는 설교가 있는 반면에 내용은 허술하지만 가슴을 움직이는 설교도 존재한다.

설교는 말과 원고 그 이상이다. 실제 설교 행위 속에서 원고와 언변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있는 데 그것은 설교자의 태도이다. 만약 설교자가 자신의 메시지에 확신이 없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그는 설교할 수 없다! 그의 설교는 회중에게 한편의 유익한 강의로 끝나고 말 것이다.

이러한 확신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과 설교에 관한 확신이다. 곧 설교는 과연 이 시대에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인가 하는 것이다. 강단에 올라가는 모든 설교자는 진지하게 이 질문을 숙고하는 것이 참으로 유익할 것이다.

그렇다면 설교는 과연 교회와 세상을 위하여 하나님이 선택한 방식인가? 그렇다! 이에 관하여 존 스토트는 이렇게 논증한다. 곧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말과 행동을 기록으로 보존하도록 하셨으며, 이 기록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과 교회에 계속적으로 말씀하신다.

따라서 설교자가 기록된 말씀을 성실히 해석하고 전하는 한 하나님의 목소리는 그의 백성 가운데 들리게 되며 그의 백성은 죄를 깨닫고 겸손해 지며 회복되고 소생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도구로 변화된다. 이러한 스토트의 논증은 ‘말씀의 신학’을 대변하는 칼 바르트의 신학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된 하나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 기록된 하나님 말씀인 성경, 그리고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인 설교의 3형식으로 이해한다.

스토트와 바르트가 보다 원론적인 입장에서 설교의 신학적 근거를 강조한다면 그것을 구원론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설교자는 마틴 로이드 존스이다. 로이드 존스는 인간의 가장 궁극적인 곤경이 죄로 인한 것이며, 가장 큰 필요가 구원임을 인정한다면, 죄인인 사람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을 아는 것이며, 이에 관해 말해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설교 뿐임을 역설한다. 따라서 설교는 언제나 목회자와 교회의 주된 임무가 되어야 한다.

교회사의 위대한 설교자들은 언제나 교회와 인간의 삶에 유일한 소망이며, 등불이며,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능력을 확신한 사람들이었다. 또한 그들은 성경과 교회사를 통하여 설교는 교회의 심장이며, 당신의 백성의 부흥을 위해 하나님이 선택한 방법이라는 성경적 확신에 사로잡힌 사람들이었다. 존 웨슬리는 이러한 확신을 그의 소명과 관련하여 이렇게 단언한다. “나는 진실로 설교 때문에 사는 사람이다!”

타락해져 가는 세상, 어두워져 가는 세상 속에 교회는 변함없이 유일한 희망이다. 그것은 교회의 많은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구원하고 변혁하는 거룩한 진리의 말씀을 주님께서 교회에 맡기신 까닭이다.

설교에 대한 시대의 다양한 도전에도 불구하고 성경과 교회사의 면밀한 연구를 통하여 설교에 관한 거룩한 확신에 사로잡혔던 스토트가 그의 설교론의 책의 이름을 대담하게 다음과 같이 정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나는 설교를 믿는다’ 당신은 설교야말로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이 선택한 방식임을 확신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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