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연 목사 납북 66주기 추모 출판기념식

故 김유연 목사 납북 66주년 추모 및 장남 김성호 목사의 저서 ‘납북, 그 순례의 길’ 출판 기념행사가 지난 6월 27일 오전 서울 신공덕동 신덕교회(김양태 목사)에서 열렸다.

김유연 목사(사진)는 황해도 동명학원을 설립하고 동아일보 경성지국을 경영하던 중 1928년 아현교회에서 입교하고 1930년 회심과 구원을 체험했다. 그해 동양선교회 성서학원에 입학하여 1931년 만리현교회를 개척하고, 1934년 제2회 교단 총회에서 발령받아 안성교회 담임으로 재직하던 중 1936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후 1938년 신의주동부교회, 1941년 무교정교회(현 중앙교회)를 담임하다 1943년 일제 경찰에 의해 검속,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에는 1945년 11월 9일 제1회 성결교회 재흥총회 부의장에 피선됐고, 신공덕동교회 담임과 경성신학교(현 서울신대) 교수, 성결교단 기관지 활천 주무와 기독교연합회 기관지 기독공보 주필 등으로 재직하면서 활발히 활동했다. 그러다 6·25 전쟁이 터지면서 북한군에 의해 8월 납북됐다.

6월 27일에 맞춰 추모예배가 드려진 것은 전쟁 발발 3일 후인 1950년 6월 27일 서울 종로 기독교서회에서 당시 기독교계 지도자 40여 명이 모여 ‘서울지역 교회 사수’를 결의한 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음 날 서울이 공산군의 수중에 떨어지자, 결의에 참여한 대부분의 타 교단 지도자들은 피난을 떠나 버렸다.

이러한 가운데 성결교회 목회자들은 상당수가 교단과 교회를 지키기 위해 남쪽으로 피난을 가는 대신 교회를 사수하기 위해 서울에 남았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린 것은 대대적인 납북이었다. 교단 지도급 인사들은 대부분 북한 공산군에 의해 북한으로 끌려갔다.

이들 가운데서도 대표격이었던 김유연 목사는 1951년 북한 내 지하교회 성도 및 지도자들과 서신을 주고받다 발각돼 납북 인사들이 모여있던 곳에서부터 어디론가 또 다시 연행돼 소식이 완전히 끊겼다고 한다.
이날 행사는 끝까지 교회를 지킨 김유연 목사를 기리기 위한 자리였다. 행사는 1부 추모예배와 2부 연구자료 설명, 3부 추모도서 출판기념행사 순으로 진행됐다. 총회와 교육원, 교회학교전국연합회, 서울신학대학교(총장 유석성 박사), 활천사, 한국성결교회문화선교회(이사장 김구식 장로) 등이 공동 주관했다.

조종남 박사는 추모예배 설교에서 “김유연 목사님의 말씀처럼 우리 몸의 부활이 일어나고 질병이 사라지며 사망이 없고 마귀는 멸절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 총회장 손덕용 목사는 추모사에서 “고 김유연 목사님은 우리 기성 110년의 역사의 초창기에 커다란 족적을 남기고, 성도들의 존경을 받으며 후학 양성에 헌신하셨다”고 전했다.

이어진 출판기념행사에서는 김유연 목사의 장남인 김성호 목사가 회고를 전했다. 김 목사는 “6·25 전쟁이 시작된 후 7월까지는 예배를 드릴 수 있었지만, 8월부터는 공산 치하에서 사실상 예배드리기가 불가능했다”며 “하지만 6.25전쟁이 발발하고도 아버지는 잡혀가실 때까지 신자들 가정을 찾아다니며 함께 예배를 드리셨다”고 회고했다.

그는 “죽을 줄 알면서도 믿음을 지키고 교회를 사수하면서 신자들과 함께할 수 있는 리더십이 오늘날 절실히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저는 사실 가족들을 고생시켰다는 생각에 한때 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했지만, 90세 가까이 되면서 회개하는 마음이 생겨 작은 책을 펴내게 됐다”고도 했다.

정상운 박사는 서평을 통해 “지난 2000년에 6.25전쟁 당시 인민군에 의해 순교한 성결교인 수를 발표한 적이 있는데, 여기에 김 목사님처럼 오직 받은 바 사명에만 충성하다 납북된 분들까지 추가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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