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대사답게 설교하라

데일 카네기(D. Carnegie)는 인간이 가장 두려워 하는 일 중 하나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연설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확실히 많은 대중들 앞에서 이야기 하는 행위는 본능적인 두려움을 안겨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것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설교자의 운명이며 소명이다.

우리는 운명적으로 대중 앞에서 말하는 자이다. 그러나 그것이 두렵다 하여 자신없는 태도나 소심한 모습으로 강단에 올라가서는 안된다. 어떤 설교자는 설교강단에서 지나치게 자기자신을 비하한다. 마땅히 설교자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한없이 낮추어야 한다. 그러나 강단에서의 지나친 겸손은 오히려 선포될 하나님의 메시지의 가치를 절하하는 인상을 회중에게 줄 수도 있다. 마틴 로이드 존스(M. Lloyd-Jones)는 설교자는 그가 말하는 것이 가벼운 것이나 사소한 것이라는 인상을 회중에게 주어서는 결코 안된다고 강조하였다.

우리가 강단에 서는 참된 자격은 우리의 인격이나 우리의 학위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연약함이 많고 흠이 많은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설교자로 강단에 설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자격은 ‘그리스도의 대사’로 부르심을 받은 부르심의 소명 때문이다. 따라서 설교자는 강단에서 설교할 때 우리를 보내신 ‘그리스도의 대사’답게 설교해야 한다. 그리고 그는 위대하신 그 분의 대사답게 회중을 압도하고 하나님의 진리로 회중을 이끌고 나가야 한다. 이는 어설픈 교만함이나 천박한 거만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설교자는 그리스도의 대사의 신분에 걸맞는 용기와 어조로 설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참으로 설교자라면 그는 어떤 제안이나 아이디어를 제시하기 위해 강단에 서는 자가 아니다. 그는 선포해야 하는 진리를 하나님으로부터 가진 자이며 그의 임무는 그를 대사로 보내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그때에 그리스도의 대사는 그를 파견한 하나님의 권위 아래 그 분의 권위를 가지고 선포해야 한다. 만약 설교자가 자신의 정체성과 자신의 임무의 심각성을 항상 의식하지 않는다면 강단은 중심을 잃고 회중에 의해 좌지우지 될 가능성이 높다.

존 스토트의 설교의 영웅이었던 캠브리지의 홀리 트리니티(Holy Trinity) 교회에서 54년간 목회했던 찰스 시므온(C. Simeon)은 1782년 목사직 임명을 받게 된 존 벤(J. venn)에게 이렇게 편지했다. “나의 사랑하는 친구여, 진심으로 축하하네. 그것은 자네가 일 년에 40 내지 50 파운드를 받을 수 있게 되어서나 목사란 칭호를 얻게 되어서가 아니라네. 그것은 자네가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가장 명예롭고 가장 영광스러운 직무,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사로서의 직무를 계승하게 되었기 때문일세.” 지금은 희미하게 잊혀져 가지만 오래전

우리의 옛 설교자들은 자신에게 맡기신 강단의 자리를 이렇게 노래했다.

“그의 왕좌는 강단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그 자리에 선다.

그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불멸의 영혼들이 그를 에워싸고

보이지 아니하는 구원자께서 그 옆에 서 계신다.

성령께서 회중들 위로 덮으시고 천사들은 이 광경을 놀라움으로 지켜보고 천국과 지옥은 그 결말을 기다리고 있다.

아, 이 얼마나 위대한 연합인가!
아, 이 얼마나 막중한 책임인가!”

거대한 세속주의 공격 속에 낮아져 가는 현대 강단의 자리에서 설교자들이 다시 본질적인 소명을 붙들게 되기를 소망한다.

“설교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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