붙들라! 그리하면 붙들릴 것이다!

어떤 한 전도자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전도 대상자를 이리저리 찾아 헤매다가 술에 취한 한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 전도자는 떨리는 목소리로 용기를 내어 그 사람에게 “예수 믿으세요. 예수 믿어야 구원을 받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 술 취한 사람에게서 나온 반응은 전혀 뜻밖이었다. “아니, 당신도 못 믿는 것 같은데, 왜 나에게 믿으라고 하는거요?” 안타깝게도 그 전도자의 목소리는 너무나 떨려 그 불쌍한 사람에게 자신이 전하는 진리를 반드시 믿어야 하는 그 어떤 확신도 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설교 강단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 많은 이들이 진리를 ‘설교’하기 보다는 ‘강의’한다. 그러나 설교한다는 것은 지식을 전하는 강의 그 이상이다. 설교는 지식을 넘어서서 그 지식에 자신의 전 존재를 담아야 한다. 오래전 그리스도를 만났고 그의 죽음과 부활을 목도했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설교자가 전하는 진리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보증할 만큼 믿을 만한 것이고 신뢰할 만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설교한다는 것은 많이 아는 지식 이상이며 말을 잘하는 수사학, 그 이상이다. 회중의 가슴에 울림을 주는 설교는 설교자의 전 존재와 인격이 실려있다. 만약 설교자가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진리에 자신의 온전한 확신을 담아 전하지 않는다면 절대로 청중은 그 설교에 감동받지 않을 것이다.

만약 설교자가 자신의 설교를 교양으로 전한다면 청중은 그저 교양으로 받을 것이요, 흥미로 전한다면 그저 흥미로 받을 것이다. 그러나 설교자의 확신있는 어조와 확신에 찬 자세, 빛나는 눈빛 등 설교자의 모든 것에서 흘러나오는 자신의 메시지에 관한 담대한 확신은 무관심한 회중이라 할 지라도 그의 설교에 귀 기울이게 만들 것이다. 

그런 까닭에 존 스토트(J. Stott)는 위대한 설교의 참된 비밀은 ‘수사학’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학’에 있다고 했다. 곧 성경과 복음에 대한 거룩한 확신! 복음만이 타락해가는 세상에서 유일한 소망이라는 확신! 그것만이 참된 설교를 만든다. 만약 이 거룩한 확신이 없다면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설교할 수 없다. 그러므로 확신과 담대함은 목청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의 가슴 속에서 흘러 넘치는 것이라 말했던 스펄전(C. H. Spurgeon)의 말은 옳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우연히 한 설교자의 부활절 설교를 들은 적이 있다. 그의 설교 내용은 흠잡을 데 없었지만 설교학자로 가진 첫 번째 의문은 오래 전 마틴 로이드 존스(M. Lloyd-Jones)가 말했던 것처럼 “저렇게 위대한 진리를 저렇게 담담한 어조로 전할 수 있는가?”하는 것이었다. 만약 그가 그 진리에 대한 거룩한 확신에 사로잡힌다면 반드시 그 진리는 그를 사로잡고 불타게 되어 있다. 마틴 로이드 존스가 설교를 ‘불붙는 이지’, ‘불타는 논리’라고 정의한 이유는 이 때문이다.

로이드 존스는 말한다. “설교란 무엇입니까? 불타는 논리입니다!… 설교는 불타는 신학입니다. 불붙이지 못하는 신학은 결함이 있는 신학입니다…. 설교는 불붙은 인간에게서 나오는 신학입니다. 진리를 참으로 이해하고 경험한 사람은 반드시 불붙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회중을 감동시키고 회중을 이 위대한 진리의 길에 초대하기 위해서 설교자는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유일한 소망이며, 그 분의 말씀은 어두움 속에 길을 잃고 죽어가는 이들을 살리는 유일한 계시의 빛임을 확신해야 한다.

진리를 붙들라! 그 순간 진리가 당신을 붙들 것이다! 그리고 그 진리는 회중을 붙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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