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호적상으로 1953년 10월 21일 생인데, 음력으로는 계사(癸巳)년 9월 14일생이다.

나는 두 살 때 홍역을 심하게 앓았는데, 그 후로 나는 경기가 심해서 죽었다가 깨어났다고 한다. 한번은 할머니가 나를 업고 아랫집에 갔더니 다 죽은 애를 업고 왔다고 빨리 집으로 가라고하여 엉엉 울면서 집에 돌아 오셨다고 한다. 할머니는 죽은 나를 잿더미에 올려놓고 다음날 땅에 묻으려고 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이튿날 새벽에 잿더미에 올려놓았던 내가 움직이는 듯 하고 약간의 미동이 있은 후 호흡이 살아나 소생하였다고 한다. 그 후로도 나는 쌀 두 톨만 입에 넣어도 먹지 못하고 꼭 한 톨씩을 입에 넣어야 만이 삼키는 등 심하게 앓았다고 한다. 하루는 어머님이 “이제 젖은 동생한테 주고 널랑은 밥 먹자” 하니까 그때서야 고개를 끄덕이더니 살이 오르기 시작하였고 정상적으로 활동하였다고 한다.

이후로 건강하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한 나는 태안읍내에서 하숙을 하였다. 중학교 3학년이 되자 본격적으로 입시 준비를 해야 했는데, 밤낮없이 시간이 나는 대로 하루에 다섯 시간 정도를 자며 공부를 하였다. 그렇게 하숙생활을 계속했기 때문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다시 몸이 쇠약할 대로 쇠약하였다. 몸이 나른하고 식은땀을 흘리며 기침이 자주 나고 가래가 끊이질 않았고 기침에서 각혈이 나오기까지 하였다.

태안의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어 보니 결핵이라고 하였다. 계속적으로 주사를 맞고 약을 복용하고 무리하지 말며 절대 안정을 취하라는 것이었다. “이제 나는 죽는구나”하며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었다. 어머님은 건강이 제일이므로 당분간 공부를 서서히 하면서 주사를 맞고 약을 잘 쓰면 나을 것이니 다른 생각은 일체 하지 말고, 오직 투병 생활에 전념토록 하라면서 안심시켜 주셨다.

투병중에도 틈틈히 공부한 나는 상급학교 진학을 5년제 전문대학 축산과로 진학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1년 동안 열심히 치료를 받았으나 결핵은 고질병이어서 쉽게 낫질 않았고 재발 되었다. 대전 삼성의원에서 치료를 받았는데 열심히 치료한 결과 1학년 종강 때서야 발병한지 2년 만에 결핵이 완치 되었다.

전문대학 시절에는 만성편도선염으로 한해에 두세 차례씩 며칠을 앓았다. 어떤 때는 목이 붓고 아파 침도 못 삼키며 심하게 앓았다. 병원에 가서 목을 째고 주사를 맞는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나는 꿈 많은 젊은 시절은 곰팡이처럼 불어나기만 했던 병때문에 좌절의 연속이었다.

그 후 사회에 나와 축산직 공무원이 되었다. 유성 종축장, 천원군청, 연기군청, 태안군청, 서산군청, 당진시청에서 34년을 공직에 몸담아 오다가 지난 2012년 12월 31일자로 정년퇴직을 하였다. 군청에 근무 할 때는 줄 담배와 과음으로 인하여 조울증을 앓기도 하였다.

퇴직 후 2013년 4월 10일 도청직원들과 오찬을 하면서 술을 많이 마셔 과음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급히 대전 선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하여 종합 검사를 받고 있는 동안 대전에 살고 있는 형님이 찾아와 이제는 술을 끊으라고 몇 번을 당부하였다. 3일간 중환자실에 입원 하면서 종합검진을 받으니 큰 문제는 없다고 하여 퇴원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또 다시 죽음을 경험한 나는 그 후로 술도 끊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열심히 살아야 겠다고 다짐했다. 이 때부터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새벽기도에 참석하였다. 담임 목사님께서 장로 후보자로 쓰임 받기를 권고 하셨지만 권사인 아내와 집안 식구들은 모두 반대를 하였다.

그러나 대전에 살고 있는 형님은 이번에 꼭 장로 후보자가 되라고 권고 하였다. 그리하여 2014년 12월 14일 사무총회에서 성도들의 투표결과 장로로 피택 되었고 2015년 4월 18일 하나님의 택하심으로 장로로 임직 되었다.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2)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아름다운 사역으로 큰 열매 맺기를 소망하며, 주님 안에서 언제나 열심히 살아가야겠다고 굳게 다짐 하였다.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