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펄전처럼, 마틴 로이드 존스처럼!

음악에 전주가 있고 책에도 서문이 있듯 설교에도 서론이 필요하다. 설교의 서론도 크게 두 가지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

첫째, 회중의 관심을 확보하기 위함이다. 예배에 참여하는 모든 회중이 설교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잠재적인 수동적 청자(聽者)를 위해 설교의 서두에서 그들의 주목을 확보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둘째, 설교의 서론은 진행될 설교를 안내한다. 설교의 서론은 집의 출입문이요, 책의 서문이다. 따라서 설교의 서론은 진행될 설교의 내용을 암시하거나 안내한다. 이러한 안내를 통하여 청중들은 전개될 설교의 주제를 파악하고 ‘진리의 배’에 본격적으로 승선할 마음의 준비를 하게 된다.

그렇다면 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설교의 서론을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이를 위해 맨 처음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그 설교를 듣는 청자가 누구인가를 고려하는 것이다.

각 교회의 정황상의 차이로 단순화 할 수 없지만, 일반적인 목회상황을 고려할 때 크게 두 가지 접근이 이상적일 것이다. 곧 주일에는 스펄전처럼, 수요일에는 마틴 로이드 존스처럼 설교하는 것이다.

큰 틀에서 볼 때 스펄전의 설교는 귀납법적이며, 마틴 로이드 존스는 연역적이다. 귀납법적으로 접근한 스펄전의 설교는 남녀노소할 것 없이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았다면 연역적으로 접근한 로이드 존스의 설교는 신앙의 연조가 있는 ‘매니아층’에게 특히 사랑받았다.

이 두 위대한 설교자의 접근법과 그들의 회중에 관한 이해는 설교의 서론이 지향해야 하는 중요한 두 갈래의 길을 제시해 준다.

주일 설교의 경우 스펄전처럼 누구나 흥미를 가지고 귀기울일 수 있는 귀납법적 설교로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왜냐하면 주일 예배는 기존 신자 외에도 초신자와 구도자를 비롯한 신앙의 연조가 적은 이들도 참여하는 거의 유일한 예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회중 자신의의 문제와 회중의 상황으로 시작하는 귀납법적 접근이 바람직하다. 설교자는 설교의 서두에서 회중이 안고 있는 현재의 문제를 다룬 후 “오늘 우리는 비슷한 상황과 형편에 처해있는 한 사람을 본문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는 어떻게 이러한 순간들을 견디어 내고 승리할 수 있었을까요?”라고 말함으로 상황(context)에서 본문(text)으로 나아갈 수 있다.

반면 수요예배는 마틴 로이드 존스처럼 설교를 시작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수요예배나 주일오후예배의 회중은 대체로 신앙의 연조가 있고 말씀에 대한 사모함이 있는 분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로이드 존스가 그랬던 것처럼 회중의 상황이나 혹은 흥미있는 예화를 사용하지 않고 오롯이 본문 자체의 본격적인 강해를 위한 서론적 접근으로 나아가도 무방할 것이다. 필자의 경우 수요예배의 경우 사도행전을, 오후예배는 에베소서를 강해한다.

이때에 로이드 존스가 그랬던 것처럼 설교의 서론에서 주로 지난 시간에 다룬 앞본문의 내용들을 요약, 반복한다. 이를 통하여 TV 드라마의 후편처럼 지난 본문의 사건이 오늘의 본문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전후 문맥적 위치와 역사적 배경을 함께 다룸으로 본문을 둘러싼 배경 자체가 본론을 위한 드라마틱한 서론이 되도록 구성한다.

그래서 전체에서 부분으로 그리고 부분에서 전체로 뻗어가는 ‘해석학적 순환’을 통해 회중이 성경에 대한 숲과 나무를 볼 수 있도록 돕는다. 이런 경우 서두에서 굳이 흥미있는 예화를 말하지 않아도 말씀 자체가 가진 매력이 회중들로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설교에 참여하도록 돕는 듯 하다.

주일에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스펄전처럼 설교하고 수요일에는 ‘일반 신자’를 위하여 ‘마틴 로이드 존스’처럼 설교하라! 그 때에 회중들은 설레임과 기쁨으로 진리의 항해에 기꺼이 참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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