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다. 새해 인사들을 나눈다. 모든 인사의 바탕은 덕담이다. 새해 인사는 특히 그렇다. 일이 잘 되어 잘 살라는 것이다. 소원을 성취하고 복 받으라는 말이다. 덕담은 사람의 기분을 돋군다. 어떤 덕담은 꽤 큰 힘을 주어 어려움을 이겨내게도 한다. 인정하고 칭찬하는 말은 사람에게 좋은 생각을 갖게 만든다. 생각이 긍정적인 쪽으로 변하면 행동이 바뀔 가능성이 높아진다.

지금은 하늘나라에 계신 아버지에 대한 기억에서 참 깊이 감사한 일이 있다. 아버님은 말수가 적은 분이셨다. 자라면서 아버지가 어려웠다. 그러나 아버지는 맏이인 내가 하려는 일을 결정적으로 반대하신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자상하진 않으셨지만 아버지의 기본 입장이 늘 나를 지지하고 격려하고 계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이런 마음을 깊이 느낀 일이 있었다. 내가 중학생일 때로 기억한다. 아버지가 우리 집에서 친구분들과 함께 식사하며 술을 잡숫고 계셨다. 어른들이 서로 얘기를 나누는데 아버지가 내 얘기를 하며 자식자랑을 하셨다. 나에게 직접적으로는 한 번도 말씀하지 않은 내용이었다. 방밖에서 이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깊이 느꼈다. 이 기억은 자라면서 내내 내게 큰 격려가 되었다. 지금까지도 그렇다. 자식으로서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있다는 인식은 참 중요하다.

칭찬하고 격려하는 말이 사람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현상은 기본적으로 말이 갖는 힘 때문이다. 말은 단순히 뜻을 전달하는 기능만이 아니다. 귀에 들어온 말은 먼저 그 사람 신체의 청각과 뇌의 인지 기능을 거치는데 이로써 들은 말의 내용을 파악한다. 그러나 인지된 내용은 즉시로 그 사람의 마음에 전달되어 감성과 정서에 영향을 준다. 좋은 내용이면 기분을 좋게 만들고 슬프거나 끔찍한 소식이면 즉시로 걱정과 슬픔에 휩싸이게 된다. 정서 구조에 닿은 말은 한편으로는 다시 신체 상태와 작동에 영향을 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영혼에까지 들어가서 작용한다. 신체와 영혼을 건강하게도 하고 병들게도 한다.

언어는 그 자체에 신적인 힘이 담겨 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만들어졌는데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에서 중심적인 몇 가지 중 하나가 언어이다. 문화인류학적으로 보면 언어는 근본적으로 신과 사람을 이어주는 매개이며 신적인 영역으로 들어가는 암호요 주문이다. 종교 현상에서 어떤 특정한 글씨나 말이 신의 활동을 시작하게 하는 신호인 것이 그런 경우다.

지금까지는 덕담에 대해 얘기했다. 무슨 초월적인 힘의 개입 없이 사람 사는 세상에서 사람들이 서로 나누는 좋은 얘기들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만도 언어는 사람을 죽게도 하고 살게도 한다. 그럼 덕담을 넘어서는 영역으로 들어가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언어에 명시적으로 신적인 힘이 개입되는 경우에서 대표적인 것이 기도이다. 기도는 의식적으로 분명하게 신에게 올리는 언어요 신과 나누는 대화이다. 우리가 사는 존재의 영역에 영들이 활동한다. 상식적인 상황으로는 판단되지 않는 어떤 초월적인 작용이 존재한다. 종교학적으로는 신들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신들은 기본적으로 자신을 부르는 곳에 작동한다. 언어는 신과 통신할 수 있는 기본 장치이다. 언어를 사용하여 명시적으로 신을 부르면 영적인 힘이 작동한다.

이제 기독교적 기도에 대하여 더 깊이 얘기하자. 성경에서 말씀하는 기도 말이다. 신앙은 사람 사는 현실에 창조와 구원의 주님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이 활동하신다는 것을 믿고 사는 일이다. 성경이 말씀하는 기본적인 메시지가 이것이다. 기도는 당연한 말이지만, 덕담 정도가 아니다. 덕담 정도만 해도 그 힘이 큰데 진리의 말씀인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라면 말할 것도 없다.

잡다한 영들과 신들을 부르는 것으로도 현실적으로 무서운 힘이 작동하기도 한다. 하물며 홀로 영원히 하나님이신 그분께 진실하게 올리는 기도라면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인이 기도한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새해다. 기도하자. 한해 내내 기도하며 살자. 그리스도인다움이 여기 걸려 있다. 교회가 서고 넘어지는 것이 이런 기도에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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