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의 ‘로맨스’

 강단은 신비스런 장소이다. 왜냐하면 문자 그대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곳이기 때문이다. 완벽한 설교 원고를 가지고 자신만만하게 올라 가지만 ‘죽’을 쑤고 내려오기도 하고 좋지 않은 몸 컨디션과 다소 부족한 원고를 가지고 강단에 섰는 데도 예기치 않게 큰 감동과 은혜가 임하기도 한다.

그 뿐인가? 심한 감기 몸살로 설교할 수 없을 것 같은 몸 상태로 겨우 강단에 섰는 데, 설교를 마치고 강단을 내려올 때는 땀에 흠뻑 젖어 오히려 기력을 회복하고 강건한 몸으로 내려오기도 한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이를 ‘설교의 로맨스’라고 불렀다.

곧 한 사람의 설교자가 강단에 올라가 설교할 때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설교에는 ‘로맨스’라고 부를 수 있는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로이드 존스는 이러한 설교의 로맨스를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이며, 떨리는 일이고 흥분되는 일이며, 보람있고 놀라운 일’이라고 말한다.

비록 설명하기란 쉽지 않지만 옛 위대한 설교자들은 성령의 주권하에 강단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설교의 로맨스를 종종 경험하였다. 그리고 비록 의식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오늘날도 변함없이 우리의 강단에는 이러한 설교의 로맨스가 가득하다.

아마 많은 설교자들이 종종 경험하는 로맨스 중 한 가지는 목양실에서 설교문을 준비할 때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문장이나 예화가 강단에서 설교하는 중에 갑자기 떠오르는 것일 것이다. 우리는 그 때에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설교의 왕자, 스펄전은 그때에 분별력을 가지고 현장에서 주시는 그런 영감들을 따라가는 것이 적절하다고 조언한다. 스펄전은 설교 중에 주시는 이러한 영감을 ‘천국의 씨앗들’이라고 불렀다. 설교자가 자신의 원고에 얽매이지 않고 현장에서 인도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할 때 그 메시지는 그 자리에 참여한 회중에게 가장 적절할 뿐 아니라 회중의 영혼과 마음 깊은 곳을 만지는 것을 경험할 것이다.

강단에서 때때로 우리는 또 다른 로맨스도 설교 중에 경험한다. 곧 서너 개의 대지로 이루어진 설교문이 설교하는 중에 생각이 자극되고 선명해져 그것이 두세편의 설교로 확장되어 각각의 설교로 완성되는 경우이다. 설교를 마치고 그 생각의 ‘번개’가 사라질 까봐 우리는 급히 그것들을 기록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 설교자의 둔한 입술을 숯불로 지지심으로(사 6:7) 우리의 언변을 넘어 어느 때보다 유창하고 선명하게 진리의 말씀이 선포되는 것도 경험한다. 스펄전은 이러한 ‘말의 자유’를 허락하시는 성령의 간섭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그 능력은 그저 보통 달변의 능력을 무한히 초월하는 것이요, 세속적인 강연과 연설을 할 때에 느끼는 그런 흥분에서 나오는 에너지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다”

그 뿐인가? 이러한 설교의 로맨스는 강단을 넘어 회중 가운데서도 일어난다. 많은 설교자들이 강단을 내려오며 자주 경험하는 로맨스는 이런 것일 것이다. 그저 기도로 말씀을 준비하고 선포했을 뿐인데 예배를 마치고 나가는 성도들이 목회자의 손을 잡고 “목사님의 설교 속에서 기도 응답을 받았어요”, “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서 한참 울었어요” “처음 교회 나왔는 데, 저를 위한 설교였어요”라고 말하는 것 아니겠나!

성령은 바람과 같아서 어디로 불지 알지 못한다.(요 3:8) 그러나 분별력 있는 설교자는 일상과 강단 속에 임하시는 성령의 임재와 인도하심을 감지하고 기쁨으로 순종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성령의 바람이 언제나 자신의 강단의 언덕을 지나 회중의 비탈길로 불어가기를 간절히 연모(戀慕)함으로 강단에 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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