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3~14일 양일 간 서울신학대학교(총장 유석성)에서는 ‘동서양의 평화’라는 무거우면서도 현실적인 주제로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의 신학부 교수들과 함께 국제학술대회를 열었다.

하지만 평화를 논하는 그 시간에도 세상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토요일 아침 미디어를 통해 파리 한복판에서 동시다발적인 테러가 발생했고 사상자가 150명에 이른다는 소식을 접했다.(지금은 사상자 수가 더 늘었다.)

‘IS(이슬람국가)’는 자신들의 소행이라 말하며 앞으로 있을 또 다른 테러를 암시했다. 시리아에 주둔하고 있는 IS 공습에 나선 국제동맹군에 프랑스가 합류하자 IS는 일종의 보복테러를 감행한 것이다. 프랑스 정부는 즉각 국경을 폐쇄하고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IS의 행위를 테러가 아닌 전쟁으로 규정했으며 시리아의 IS 본거지 ‘라카’에 최대 규모의 무자비한 비행공습을 퍼부었다. 그로 인한 인명피해는 보고되지 않고 있다.

‘13일의 금요일’의 악몽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이와 같은 전개는 9.11 때도 비슷했다. 테러는 보복을 낳고 보복은 다시 테러에 대한 공포를 낳는다. 나는 폭력의 문제를 선악의 잣대가 아니라 강자와 약자의 구도로 보고자 한다. 힘 있는 자들의 평화가 위협받을 때, 약자들은 응징을 당한다. 그리고 약자들은 다시 강자를 본받아 보복을 감행하고 이 악순환은 끝이 없다. 평화를 쟁취하고자 하는 보복과 응징의 악순환, 그 어디에도 평화는 없다. 이번 테러에서 나는 ‘약자에게 평화가 없다면, 강자에게도 평화는 없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런데 어쩌면 약자는 강자가 만든 괴물일지도 모른다. 이슬람 과격테러단체인 IS는 알카에다에서 생겨났다고 한다. 알카에다는 미국의 지원을 받아 아프카니스탄을 침략한 구 소련에 저항하던 단체였지만 괴물이 되어 뉴욕에 9.11테러를 감행했고, 이제 IS라는 또 다른 괴물을 낳았다.

괴물은 통제불가능한 거대폭력집단으로 진화하여 자신의 분노를 터뜨린다. 정의와 평화를 사랑한다는 자들도 괴물을 포획하기 위해 스스로 폭력을 정당화하는 괴물로 변모한다. 결국 현실에서는 폭력의 정당성만이 남게 되고, 평화는 사라진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220년 전, 1795년에 철학자 칸트는 자신의 ‘영구평화론’에서 평화를 위한 현실적 방안으로 법적인 규율들과 국제적인 협력기구의 설립을 제안했다고 한다. 그동안 평화를 위한 국제간의 법적이고 제도적인 협력이 깊어지고 넓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도 평화는 소원하다.

한스 큉은 ‘세계윤리구상’에서 “대화 없이는 평화가 없다”고 말하며 개별 종교의 에토스에 기반을 둔 종교간 대화를 통한 평화논의를 제안했다. IS와 같은 잔악한 테러단체에 무슨 에토스가 있을까 의구심이 들기도 하지만,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는 옛 로마의 경구를 따르기 보다는 ‘전쟁을 원하지 않거든 평화를 준비하라’는 신학자 바르트의 말에 귀 기울이면서 ‘평화를 원하거든 대화를 준비해야 한다.’

성경에 따르면 평화는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을 통해서 가능하며, 그리스도의 희생은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엡2:14)을 허물고 평화를 창조한다. 폭력의 악순환을 허무는 그리스도의 사랑은 ‘멀리 있는 자’에게나 ‘가까이 있는 자’ 모두에게 샬롬을 선포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강자의 잃어버린 평화를 안타까워할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평화를 빼앗긴 약자의 눈물도 닦아 준다. 모두가 함께 평화로워지기 전까지 진정한 평화는 불가능하다. 대림절이 얼마 남지 않았다. 평화의 주님으로 오신 아기 예수, 가장 약한 자의 모습으로 오신 그 분께 엎드려 경배할 때, 분노와 폭력과 불신의 담이 허물어질 때 비로소 평화는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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