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을 매듭지을 때(행 15:22~29)

백광현 목사(비전교회)
서로 반대의 회전방향으로 성장하는 넝쿨 식물인 칡(葛)과 등(藤)나무가 얽혀있는 모습이 갈등(葛藤)이라는 단어를 만들어 냈다. 인간사회의 거의 모든 조직은 다소간의 갈등관계를 가지고 있는데 사도행전의 두 교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몸에 칼을 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예수 믿고 구원받는데 할례가 뭐가 그리 중요한가?”라고 생각하는 선교사들과 “이방인 신자들도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유대인 신자들 사이에도 갈등이 있었다.

이러한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모인 예루살렘회의는 모두를 살리는 결의를 하게 되었고(행 15장) 그 결의 사항을 전달하는 과정이 본문에 기록되었다.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가서(24절)

예루살렘 사도들의 위임을 받지도 않았고 자격도 없는 어떤 유대인 신자들이 안디옥에 건너와서 말로 괴롭히고 혼란을 준 것을 바로 잡으며 수리아 지역의 성도들을 위로한다. 본질이 아닌 문제 때문에 갈등을 심화시키고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방축의 물이 새기 시작할 때 즉시적으로 막는 지혜(잠 17:14)가 필요한 것인지 혹은 느헤미야 처럼 반응하지 않는 것이 옳은지를 분별해야 한다(느6:1-9).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않는 자, 우리가 사랑하는 자(25절)

예루살렘의 회의의 결과를 통보하는 일을 맡은 이들에게 붙은 관형어들이다. 이러한 소개를 받는 일은 우리가 흠모할 만한 것이다. 갈등을 푸는 것은 힘이 아니라 인품이다. 하나님 앞에 서는 날까지 가지고 갈 것은 이 땅에서 모으고 쌓은 것이 아니라 신앙의 인격이요 주님의 기억하심이다.

성령과 우리는(28절)

성령의 음성을 듣는 귀가 있고 그 음성에 순종할 손과 발이 있었던 안디옥교회는 선교의 위대한 장을 열었고(행 13:1~3)오늘 예루살렘교회도 이방인 백부장인 고넬료의 가정을 전도하며 체험한 베드로의 간증(행 10장)과 1차 선교여행에서 돌아온 두 선교사의 보고를 통해 이방인을 할례 없이 받아주시며 성령 부어주신 하나님의 뜻을 알았을 때 전통의 틀(창 17:14)을 과감하게 깨뜨리고 순종한 것이다.

아무 짐도 지우지 아니 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28절)

할례를 고집하는 동안 예수님을 온 세상의 구세주가 아니라 유대인의 랍비로 묶어두는 것이요 율법의 짐을 지우는 것이었다. 예수님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오라 하셨을 때(마 11:28) 그 짐은 유대인들이 등에 짊어진 613 항목 율법의 짐이었다. 주님의 양심을 회복받은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들은 자기들도 능히 지지 못한 율법의 짐을 이방인에게 부과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다.

성령의 지시에 민감하며 사명에 생명을 걸고, 갈등을 지혜롭게 극복하며 어린 성도들의 짐을 덜어줄 때 우리는 주님께 큰 승전의 보고를 드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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