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를 말하고 진리를 수호한 종교개혁의 선구자
루터보다 100년 앞서 종교개혁 활동 … ‘프라하’ 종교개혁 요람으로 바꿔

▲ 체코 프라하 광장에 세워진 얀 후스의 동상. 동상 아래는 "서로 사랑하십시오. 모든 이들에게 진리를 요구하십시오"라고 새겨져 있다.
종교개혁은 마르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 예배당 정문에 95개조의 항의문을 붙이면서 타올랐다. 그가 밝힌 종교개혁의 횃불은 온 유럽을 밝혔을 뿐 아니라 개신교의 탄생과 가톨릭의 갱신을 불러낸 위대한 깃발이었다.

그러나 루터의 종교개혁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니다. 그가 태어나기 100여 년 전 영국 땅에 존 위클리프가 가톨릭교회의 오류를 비판하면서 성서 중심으로 모든 것을 바라볼 것을 요청했고 독일의 동쪽에 위치한 보헤미아 왕국(현 체코 공화국)에선 얀 후스를 중심으로 성서에 근거한 종교적 실천이 활기를 띠고 있었다.

종교개혁주일에 앞서 얀 후스의 열정이 살아 숨쉬는 체코 프라하를 찾아 얀 후스의 발자취를 돌아봤다.

프라하 광장에서 만난 후스
얀 후스를 만난 첫 장소는 프라하 광장, 100여 년 전 이 곳에 후스의 동상이 세워졌다. 그러나 이곳에 세워진 후스 상은 결코 후스를 표현한 동상이 아니다. 루터나 칼뱅과 달리 후스는 자신의 얼굴을 단 한 점의 그림으로도 남기지 못했다.

당시 체코의 문화적 풍토 때문이거나, 아니면 44세의 짧은 생애와 12~13년 여의 상대적으로 짧은 종교적 삶 때문일지도 모른다. 자연히 프라하의 대표적 인물로 후스를 내세우면서도 그의 얼굴은 체코인의 표준적 얼굴, 그들이 가장 성자답게 생각하는 모습을 형상화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신념에 찬 그의 눈과 얼굴, 위풍당당한 그의 모습을 보노라면 ‘아, 그는 그렇게 당당하게 자신의 신념을 표현했구나’하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된다. 동상의 아래 부분엔 “서로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모든 이들에게 진리를 요구하십시오”라는 말이 체코어로 새겨져 있다.

이 글귀는 그가 도미니크 수도원 지하 감옥에서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이다. 그가 말한 진리는 과연 무엇일까? 중세 교회가 외면하고 있는 가르침을 의미하는 것 아닐까? 오늘날 과연 우리는 스스로에게, 그리고 교회에게 진리를 요구하고 있는가 묻게 된다.

체코 종교개혁의 요람 : 베들레헴 예배당
발걸음을 옮겨 베들레헴 예배당으로 향했다. 1394년에 건축된 베들레헴 예배당은 가톨릭성전이나 교회로서 건축된 곳이 아니다. 시민을 위한 예배당으로 세워진 이 건물은 오직 체코어로만 설교토록 규정됐고, 후스는 이곳에서 1402년부터 10여 년 간 3000여 회에 걸쳐 설교했다.

후스가 프라하대학 교수와 총장으로서 신학적 문제를 고민하고 제기했다면, 베들레헴 예배당은 목회자이자 설교자로서 프라하 시민을 일깨우는 그의 종교개혁의 현장이였다.

성전 외부는 하얀색 건물로, 특별한 장식이 보이지 않았다. 내부 또한 일반 가톨릭교회와 달랐다.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교회 내부 벽에 그려진 낡은 성화와 찬송가 악보였다. 한글로 된 안내문을 통해 그것이 복원된 후스의 흔적임을 알게 되었다.

후스 때 예배당 내의 조각상을 치우고 벽면에 십계명과 찬송가 가사를 새겨 넣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후스가 성도들이 성서 말씀대로 살기를 바랐고, 이를 위해 성도들이 성서를 읽을 수 있도록 성서를 체코어로 번역하고 찬송가를 지어 대중에게 감동을 선사코자 한 것이다.

성서와 진리를 강조한 외침
“그리스도인 여러분, 그대는 진리를 찾고, 진리를 듣고, 진리를 배우고,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말하고, 진리를 지키고, 죽기까지 진리를 증언하십시오.”

600여 년 전 강단 왼쪽 벽에 있는 설교단에서 외치던 후스의 당당한 외침이 지금도 들리는 듯 했다. 그는 당시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교회와 교황의 권위보다 우위에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말씀 안에서 그리스도의 임재를 경험하며 거룩한 진리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설교했다. 후스의 외침은 600년 후인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지 않을까.

베들레헴 예배당을 나서면서 이곳에 오기 전 들렸던 옛 시청사 바닥 글귀를 떠올려 본다. 흰색 페인트로 선명히 새겨진 ‘1621. 6. 21’라는 글귀와 27개의 작은 십자가. 후스의 후예들의 죽음을 기념하는 곳이다. 후스가 죽은 후 200여 년이 지난 후 보헤미아는 다시 가톨릭의 영향력 아래에 놓였고 후스처럼 27명의 지도자들은 시청사 앞에서 처형당한 것이다.

그들의 이름은 구시청사 벽에, 그리고 처형 장소엔 그들을 상징하는 27개의 십자가가 새겨진 것이다. 무수한 사람이 밟고 지나는 하얀 십자가 표시와 글귀에서 이곳이 ‘프로테스탄트’(개신교인)는 곧 불의에 저항하는 자임을 다시금 깨달았다.

▲ 공의회가 열렸던 콘스탄츠 뮌스터 성당
후스의 마지막 발자취, 콘스탄츠
얀 후스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교회의 이름으로 죽임을 당한 독일 땅 콘스탄츠로 향했다. 후스는 1414년 10월 자신의 사상을 교황과 대주교, 황제와 각 나라의 지도자 앞에서 증언하기 위해 600km에 이르는 길을 떠났다. 바로 카톨릭 회의(콘스탄츠공의회)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사실 후스는 그 길을 가면서 죽음을 예견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후스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콘스탄츠에 도착한 후스는 얼마 되지 않아 감옥에 갇혔다. 가톨릭교회와 황제는 ‘이단에게 한 약속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논리로 후스를 배신했고 후스는 도미니크수도원의 차가운 지하 감옥에서 추운 겨울을 보내야 했다. 이듬해 공의회장에 불려가 자신을 변호할 기회가 주어졌지만 죽음의 시간표가 주는 압박을 피하지는 못했다.

그는 죽음 앞에서도 “주 예수 그리스도여, 내 모든 대적들을 용서하소서, 그들이 나를 거짓 비방하고 거짓 증인들을 세우고 거짓 논술들을 날조한 것을 아십니다. 당신의 무한한 긍휼을 위해 그들을 용서하소서”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한 마리 백조로 부활한 후스
뮌스터 성당은 공의회(1414~1418)가 열렸던 장소라고 보기엔 크지 않았고, 다른 독일의 성당보다 검소했다. 성당 한 곁에는 공의회의 역사와 주요 결정을 내용으로 한 대여섯 개의 전시판이 설치돼 관광객을 맞이했다.

이 공의회에서 후스는 ‘성경적 증거’를 요구했다고 한다. “자신이 틀렸다는 성경적 증거를 보여 준다면 공의회의 지시와 교정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 후스의 요청이었다. 하지만 공의회는 자신의 시간표에 따라 후스를 ‘참으로, 실제적이고, 공개적인 이단’으로 정죄했다.

그의 성직자 의복은 찢김을 당했고 그는 악마의 그림이 그려진 종이 모자를 씌운 후 화형대 위에 세워졌다. 그리고 뜨거운 불이 그를 태웠고 그의 흔적을 담은 재는 라인강에 뿌려졌다고 한다.

후스가 처형되기 전 한 말이라 믿기 힘들지만 역사는 이렇게 기록한다.

“당신들이 지금은 거위(후스라는 이름의 뜻) 한 마리를 불태우지만 백년 후에 당신들이 해칠 수도, 구이를 할 수도 없는 백조가 나올 것이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100년 후 등장한 마르틴 루터는 후스의 이 예언 속 인물임이 분명하다. 비록 후스는 역사 속에 사그러졌지만 그의 가르침과 정신은 보헤미아와 독일을 깨웠고, 100년 후 유럽 전체의 종교개혁 열기로 부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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