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명룡 목사(서울강서지방‧큰나무교회)
참 종교는 진리를 소유해야만 한다. 과연 진리란 무엇인가?

종교 다원주의자 오강남 교수는 “진리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노자의 도덕경을 인용하면서, ‘도라고 말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닙니다(道可道 非常道)’라는 말씀처럼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진리는 참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는 진리란 말과 관계되는 무엇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존재 자체, 실재(reality) 자체를 말한다고 했다.

예를 들어 “서울과 부산간의 거리가 ‘멀다’ 혹은 ‘가깝다’ 하는 진술은 절대적인 진리가 될 수 없다.” 오히려 “진리는 서울과 부산 간의 거리 그 자체, 그 실재 자체인 것이다”라고 그는 주장한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진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제시하지 못한다. 게다가 그 주장은 모순을 가지고 있다.
오 교수는 진리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고 강조하면서도, 그와 동시에 그러한 자신의 주장(진리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은 진리라며 분명하게 ‘글로 표현’하고 있다. 오 교수는 주장 자체를 말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주장엔 모순이 있다. 오히려 그의 주장은 ‘진리란 말로 표현될 수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다시 본래 질문으로 돌아와서, 진리(truth)란 무엇인가? 진리란 모호한 것이 아니라 분명한 것이다. 진리란 ‘어떤 명제가 실재(reality)와 일치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진리란 어떤 진술이나 주장이 실제 세계와 일치 할 때 진리라고 말할 수 있다.

예컨대 ‘2 더하기 2는 4다’는 것은 진리다. 이 수학적 진리는 지구에서 뿐만 아니라 달에서도 진리다. 또한 ‘서울에서 대전 사이의 거리는 서울에서 부산 사이의 거리 보다 훨씬 가깝다’는 명제는 진리이다. 왜냐하면 이 주장은 실제 세계에 잘 부합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어떤 진술이나 주장이 실제 세계와 일치할 때 진리로 받아들일 수 있다. 아무리 멋진 주장일지라도 그것이 실제에 일치되지 않는 경우엔 진리라고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진리의 문제는 어느 아이스크림이 맛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느 것이 정답이냐의 문제이다.

‘3 더하기 4는 몇인가?’라는 질문에 정답은 7뿐이다. 6이나 8은 7에 가깝지만 정답이 아니다. 왜냐하면 6이나 8은 3 더하기 4에서 나올 수 있는 실제 값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리는 그 자체로 배타성을 가지고 있다.

세상의 여러 종교들은 인간의 궁극적인 질문에 대해서 각기 다른 답을 제시하고 있다. 과연 무엇이 궁극적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 기독교는 천지를 창조한 인격적인 창조주 하나님이 계신다고 주장한다. 불교는 창조주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불가지론적인 입장을 취한다. 힌두교는 신은 하나가 아니라 수없이 많으며 우주 자체가 신이라고 주장한다. 이슬람은 유일신 창조주를 믿지만 인간과 교제할 수 있는 인격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이처럼 각 종교는 궁극적인 문제에 대해 서로 상반된 주장을 하고 있다. 이것은 인위적으로 일치 시킬 수 없다. 모든 종교가 동일한 문제에 대해서 서로 상반된 주장을 할 때, 그 주장 모두가 정답일 수는 없다. 이 때 논리적 선택은 모두가 틀렸거나 그 중에 하나만이 진리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해 볼 때 어느 종교가 진리를 가졌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어느 종교의 주장이 역사성이 있고 논리적 일관성, 그리고 실제 세계와 일치성이 있는가를 따져 봐야 한다. 이러한 판단기준으로 세계 종교를 연구해 보면, 기독교만이 유일하게 역사성과 논리적 일관성, 그리고 실제 세계와 일치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기독교 신앙은 무조건 믿어도 진리이다. 한글을 모르는 사람이 복음을 듣기만 하고도 믿을 수 있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다. 또 기독교 신앙은 따지고 믿어도 진리이다.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이성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살피고 연구해도 믿을 수 있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다. 진리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이 복이요, 진리이신 예수님을 아는 것이 참된 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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