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수 교수(서울신학대학교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8월 19일 에드윈 길보른(Edwin Kilbou rne) 선교사가 98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그는 서울신대 2대 학장을 지냈고, 오래 동안 동양선교회 한국 책임자로 활동했다.

1917년 일본에서 태어난 그는 동양선교회의 창립자 가운데 한사람인 E. A. 길보른의 손자다. 그의 아버지는 오랫 동안 동양선교회 부총재로, 중국선교 책임자로 사역한 E. L. 길보른이다.

한국전쟁 이후 구호사업으로 한국에 크게 기여한 엘마 길보른은 그의 동생이다. 길보른 가문 3대는 이렇듯 한국성결교회와 깊은 관계를 갖고 있다.

에드윈 길보른은 1920년부터 한국에 와서 살았다. 당시 동양선교회는 선교본부를 일본에서 한국으로 옮겼다. E. A. 길보른은 한국 감독이었으며, 아들 버드 길보른도 아버지와 함께 한국에서 선교했다.

그러나 1925년 동양선교회 총재였던 카우만이 세상을 떠나면서 E. A. 길보른은 총재가 되어 미국으로 갔고, 한국사역은 그의 아들이 담당하게 되었다.

그 후 동양선교회는 카우만의 유언에 따라서 중국선교에 집중하게 되어, 버드 길보른은 상하이로 갔고, 에드윈과 그의 형제들도 아버지를 따라서 중국에 가게 되었다.

에드윈 길보른은 상하이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미국으로 건너가 애즈베리대학을 졸업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에드윈은 그의 두 동생과 함께 중국으로 갔지만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이들 형제는 한국전쟁 이후 한국성결교회의 재건과 서울신대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이 당시 한국은 동양선교회의 가장 중요한 선교지였다.

에드윈 길보른이 동양선교회 한국책임자로 있을 때 한국성결교회는 큰 변화를 겪었다. 당시 한국성결교회는 NCC 가입문제로 분열하였다.

그러나 동양선교회는 두 차례에 걸친 통합에 필요한 여러 가지 도움을 주었다. 그 결과 역사에 보기 드문 합동을 달성하였다.

또한 동양선교회는 선교회 유지재단의 재산을 출연하여 학교법인을 만들고, 서울신학대학을 정규대학으로 인가받도록 했다.

에드윈 길보른은 이명직 목사가 은퇴한 후 1961년부터 학장서리 일하다 1964년 2대 학장으로 취임했고 1969년 조종남 박사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에드윈 길보른은 또 아시아의 성결교회들 사이의 교류를 원했다. 1967년 에드윈 길보른은 한국성결교회 지도자들을 설득해 일본성결교회 창립 50주년 축하 모임에 참여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서 아세아태평양성결연맹이 만들어졌고, 오늘의 세계성결연맹이 되었다.

에드윈 길보른은 1973년 한국을 떠나 미국 동양선교회 본부로 가서 수석 부총재가 되었으며, 선교의 가능성을 탐색하였다.

아울러서 에드윈 길보른은 은퇴 후에 ‘세기를 가로지른 다리’(Bridge Across the Century)라는 저서를 남겨 일본, 한국, 중국에서 활동한 동양선교회의 선교역사를 정리했다.

에드윈 길보른의 부인 나누(Nanoo)도 한국에서 활동하던 장로교 선교사의 딸이었다. 나누의 원래 이름은 에드나(Edna)였는데 주변사람들이 누나라고 불렀고, 이것이 변하여 나누라는 별명이 되었다.

나누는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수였던 스탠리 마틴(Stanley Martin)의 딸로서 평양 외국인학교를 졸업했고, 애즈베리대학에서 에드윈을 만나서 결혼했다.

유명한 독립운동가 이갑성은 바로 스탠리 마틴의 제자였고, 그의 아들이자 나누의 오빠인 제랄드 마틴은 한국전쟁에서 군의관으로 복무하다가 전사하였고, 그의 언니 마가렛 마틴은 감리교 선교사로서 오랫 동안 이화여고에서 가르쳤다.

에드윈과 나누는 1950년에 한국에서 딸을 낳았는데 며칠이 안 되어 세상을 떠나 양화진에 묻혔다. 양화진에 묻힌 유일한 동양선교회 관련 인물이다.

한국성결교회는 길보른 가문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에드윈 길보른의 소천을 계기로 한국성결교회는 동양선교회 선교사들의 수고를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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