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용 교수(서울신대 신학과)
한국 사회가 아프다. 크고 작은 여러 사건, 사고들 그리고 계층별, 지역별, 소득별, 이념별 벌어질 때로 벌어진 간극. 그리고 그 때문에 생겨나는 각양각색의 파열들이 쉼 없이 매체를 통해 공시되고 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그런 아픔들이 매번 알려지고 확산되고 있는데도 좀체 그것이 치유되고 있지 않는 우리의 현실이다.

‘사이코패스’(psychopath)란 단어가 있다.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키거나 상상을 넘어서는 잔혹한 범죄 현장에서 종종 이 단어가 등장한다.

유영철, 강호순 같은 연쇄 살인범에, ‘나영이 사건’의 범인 조두순 같은 경우가 사이코패스의 전형들로 알려져 있다.

이 용어는 19세기 프랑스의 정신과 의사였던 필리프 피넬에 의해 처음 세상에 알려졌고, 독일의 심리학자 슈나이더에 의해 그 개념이 정리되었다.

사이코패스는 반사회적 인격 장애로 풀이되며, 죄책감의 결여, 과도한 자기중심성, 공감 능력 부족 등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사이코패스는 인간 두뇌의 전두엽 부분이 정상인 보다 덜 활성화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전두엽 부분은 인간의 감정을 관장하는 곳이다. 그런데 사이코패스들은 이 부분에 문제가 있어서 상대방의 감정을 헤아리는데 큰 장애를 가지게 된다고 한다.

보통 우리는 남의 고통을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태어난다. 그래서 직접 우리 몸에 해를 끼치지 않더라도 상처 난 사람의 모습만 봐도 그 통증을 미루어 느낄 수 있게 된다. 따라서 피를 보면 소스라치게 놀라고, 상처를 보면 가슴이 떨린다. 자신의 것이 아니더라도!

하지만 사이코패스에겐 이런 기재가 잘 작동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고통만 지각할 뿐, 남의 아픔은 좀체 느껴지지 않는다. 슬픔 역시 그렇다.

나의 것만 실감날 뿐, 남의 통증은 전혀 내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러니 그들의 이기심은 과도해지기 마련. 타인의 아픔이 느껴지지 않기에 이들은 쉽게 폭력적이 되어버린다.

사실 폭력은 남을 철저히 ‘대상화’하거나 ‘타자화’ 할 때 생겨난다. 내 앞의 대상이 나와 소통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그것’(it)이 되었을 때 우리는 폭력적이게 된다.

하지만 그럴 때 어김없이 우리의 전두엽은 나 아닌 남이 받고 있는 고통과 통증을 우리도 느끼게 하여 무차별적 폭력행위를 미연에 방지토록 해준다. 하지만 이 부분에 장애가 있다면 우리 가운데 폭력은 멈추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떤 점에서 교회는 우리 사회의 전두엽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다른 이들은 지체로 연결된 새로운 형제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사랑으로 이어진 공동체이기에 교회는 이웃의 고통을 곧 나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그들을 제3자로 밀어내지 않고, 언제나 나와 너의 관계 속에서 그들과 연관을 맺고자 한다. 그렇게 교회는 세속과는 구별되는 ‘대조사회’로써 제대로 된 형제 사랑을 전하는 이 땅의 기관이 되어야 한다.

대한민국의 봄은 아픔과 통증이 넘쳐나는 계절이다. 대한민국의 봄에는 3.1절, 4.16 세월호 참사, 4.19 혁명, 5.16 군사정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등 역사·사회적으로 다양한 아픔과 통증이 아로 새겨있다. 게다가 세월호 참사는 불과 1년 밖에 지나지 않은 여전히 살아있는 상처이기도 하다.

꽃피고 아지랑이 노래하는 봄날을 우울하고 불편하게 만드는 적지 않는 사건, 사고들이 우리 주변에 가득하다. 때론 사람들은 오래된 기억들을 끄집어내어 왜 마음을 불편하게 하냐고 투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계절일수록 불감보다는 공감을 통해 서로 이해하고 소통하려는 지혜가 필요하다. 상처의 치유는 덮어놓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진단하고 처방함으로써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덮거나, 진단하거나 처방하기에 앞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공감하기일 것이다. 그의 아픔을 나의 것으로 가져오는 행위가 전제되지 않은 덮음이나 진단, 처방은 제대로 힘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공감은 ‘경천애인’(敬天愛人),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신 주님 명령의 핵심이며, 따라서 신앙인과 교회는 공감의 최전선에 서 있어야만 한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 사회가 아프고, 공감의 부족 혹은 부재에서 오는 갈등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제대로 기능하고 역할 해야 할 교회가 오히려 불감의 늪에 빠졌다는 신호일 수도 있다. 다시금 공감을 위해 교회가 무언가를 해야 할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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