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해석에서 범하기 쉬운 오류들

손동식 박사(하저교회∙런던신학대학 설교학 박사)
오래전 영국 유학 시절, 마틴 로이드 존스가 설립한 런던의 복음주의 도서관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곳에는 한국의 한 유명 설교자의 설교집이 영어로 번역되어 비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책의 첫 장에는 도서관에서 적은 글귀가 이렇게 쓰여 있었다. “우리 도서관은 이 책을 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원하신다면 빌려갈 수는 있습니다.”

다소 충격적인 글이긴 하지만 성경 본문의 올바른 해석을 중시하는 영국 교회의 풍토상 그 책은 그들의 기준에 다소 모자랐던 듯하다.

강해설교의 왕자 캠벨 모건(Campbell Morgan)의 말처럼 ‘설교는 말씀의 선포이며, 계시된 그대로의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다’.

따라서 설교자는 본문에 충실한 해석과 함께 해석의 오류를 피하기 위해 절차탁마(切磋琢磨)해야 한다. 특히 설교자는 단어 해석에서 빠지기 쉬운 세 가지 함정을 조심해야 한다.

첫째, 문맥을 무시하는 오류이다. 마스터신학교의 메이휴(R. Mayhus)는 성경 해석에서 가장 중요한 세 원리를 “첫째도 문맥,  둘째도 문맥, 셋째도 문맥”이라고 강조한다.

이는 해석자들이 가장 많은 해석의 오류를 범하는 부분이다. 같은 단어라도 해석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설교자는 늘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죽었다’는 단어는 문맥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가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스타일이 죽인다’라고 할 때 그것은 스타일이 멋있다는 전혀 다른 뜻이 된다.

이와같이 성경의 단어들도 문맥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예를 들어 ‘육신’이라는 단어는 어떤 경우에는 문자 그대로 ‘몸’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인간의 ‘죄성’을 의미하는 뜻으로 쓰인다.

또한 골로새서 3장15절의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는 구절에서 ‘평강’이라는 단어는 신자 개인 마음의 평강을 의미하는 듯하지만 문맥을 조심스럽게 살피면 그것은 단순한 개인 마음의 평강이라기보다 교회 성도 간의 화평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

둘째, 단어의 어원을 무분별하게 해석에 적용하는 오류이다. 단어의 어원 연구는 단어의 의미를 풍부하게 밝히는 데 기여한다. 그러나 단어의 어원적 의미가 그 단어의 본래적 의미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영어의 ‘좋다, 근사하다’ 뜻의 ‘nice'의 어원은 ‘무식하다’는 뜻인 라틴어 ‘nescius’이다. 그러나 그 어원이 ‘무식하다’라는 뜻에서 왔다고 하여 ‘He is nice'를 ‘그는 무식하다’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일반적으로 단어 해석에서 중요한 것은 그 단어가 기록된 당시에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느냐 하는 공시적(synchronic) 접근이다. 따라서 어원적 접근을 모든 단어의 해석에 맹목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

셋째, 사용된 단어가 비유적(figurative)인지 문자적(literal)인지 분별해야 한다. 이는 신약의 비유나 예언서의 해석에서 특히 중요하다.

예를 들어 에스겔 37장의 ‘마른 뼈 골짜기의 환상’에서 마른 뼈란 문자 그대로 ‘마른 뼈’가 아니라 ‘이스라엘 족속’을 가리킨다(겔 37:11). 따라서 마른 뼈의 회복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의미한다.

또한 계시록 7장 4절의 “인침을 받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에서 십사만사천이라는 숫자 역시 비유적 표현이다.

이 숫자는 12×12×1000으로 구성된 숫자로, 구약의 12지파와 신약의 12사도, 그리고 많음(혹은 군대 단위, 민 31:4)을 의미하는 1000을 곱한 숫자로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 전체 혹은 교회 공동체 전체를 상징하는 숫자이다.

그러나 이단 신천지는 이를 문자적 의미로 해석함으로써 14만4000명만이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며 그 숫자를 모아야 한다는 잘못된 교리로 빠지고 말았다.

바쁜 목회 일정 속에 말씀의 연구는 땀과 눈물을 요구한다. 자신이 진실로 ‘그리스도의 대사’로 부름받은 자임을 깊이 인식하는 설교자는 성실한 연구를 쉬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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