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제가 살던 동네엔 똥통이 있었습니다. 구덩이를 깊이 파놓고 그곳에 각 집에서 나온 인분을 채워놓고 필요할 때마다 퍼내 자신의 논밭에 뿌려주는 일종의 거름통이었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엔 놀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숨바꼭질, 다방구, 그저 뛰어노는 것이 놀이의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가 정신없이 놀다가 이 똥통에 빠지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갑작스러운 아이들의 비명과 고함소리에 동네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다들 발만 동동 구를 뿐 그 어느 누구도 그 똥통에 들어가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한 아주머니가 그 구덩이로 한치의 주저함도 없이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를 등에 업고는 주변 사람이 던져준 막대기를 붙들고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곤 동네 우물가로 뛰어가는데 놀라운 것은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홍해 바다가 갈리듯 양쪽으로 쫙 갈라서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도 그 아이를 대신 안아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물가에서 그 아이의 똥을 닦아 주던 그 아주머니는 그 아이의 엄마였습니다.

쉽게 잊을 수 없는 이 사건 속에서 저는 오늘 우리가 놓치고 있는 진정한 교회의 모습을 봅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우시려 했던 ‘교회의 원형’을 보게 됩니다. 온통 허물과 죄로 뒤범벅이 된 우리를 더럽다 하지 않으시고 그대로 안으시고 건지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의 몸인 교회가 서 있어야 할 자리를 보게 됩니다.

여러 관계에서 우리들이 자주 경험하는 충동과 유혹은 쉽게 비난하고 비판하고 질책하고 선과 악을 가르는 것입니다. 항상 나는 옳다는 암묵적 전제 아래 말입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선과 악을 가르는 자리에 설 수 없음을 성서는 말씀하십니다. 그 대신 성서는 선악과가 아닌 생명나무 곧 십자가가 우리가 서야 할 자리임을 말씀하십니다. 이것만이 우리가 설 자리요 살 자리임을 말씀하십니다.

좋은 목적을 가지고 비판하고 질책하고 충고하고 권면한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경우 이 방법으로 고쳐지거나 나아지지 않습니다. 완악한 시대에서는 더욱 더 그렇습니다. 진정으로 변화시켜 주는 것은 선과 악을 구분하는 선악과가 아니고 십자가에서 보고 경험하듯 모두를 안고 모든 것을 자신의 죄로 덮고 자신을 사랑의 제물로, 희생 제물로 드리는 생명나무 역사입니다. 똥통에 더렵혀진 사람이나 똥통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똥통에 들어가 기도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구하고 구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한국교회의 모습이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 빠진 모습니다. 따라서 교회를 향한 수없이 많은 소리가 있습니다. 냉소적인 소리, 맹목적 비난의 소리, 살을 에는 듯한 차가운 소리, 다양한 갱신의 소리, 다 귀담아 들어야 할 소리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 들어야 할 소리는 이 웅덩이로 들어가 가슴 아프게, 가슴을 찢으며 구원할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하는 소리입니다. ‘내 죄입니다’ ‘내 죄악 때문입니다’ ‘우리의 탐욕과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라고 울부짖는 소리입니다.

모든 죄악으로부터 모두를 건질 것은 바리새적 의의 사건이나 노력들이 아닙니다. 그저 똥통에 들어가 자식을 건진 어미처럼 십자가일 뿐입니다. 지금 이땅의 교회에 필요한 것은 이 십자가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십자가 외에는 내가 어떤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하였다’는 사도 바울처럼 십자가로 치열하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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