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0억 원을 들여 서초역에 거대한 예배당을 지은 사랑의교회가 해가 바뀌어도 여전히 시끄럽다. 최근 고 옥한흠 목사의 아들인 옥성호가 사랑의교회를 빗대어 쓴 소설 ‘서초교회 잔혹사’가 세간의 이목을 끌고 있다. 이 교회는 지난해 휘황찬란한 예배당을 봉헌하며 “하나님께서 다 하셨습니다”라는 현수막을 걸었다. 그러자 어떤 이가 그 문구에 ‘이응’ 하나를 더 보탰다. “하나님께서 ‘당’하셨습니다.”

1월 초 한겨레신문 인터뷰기사로 뜨거운 반응과 큰 울림을 준 효암학원 이사장 채현국 선생과 관련된 어느 페친(페이스북 친구)의 개인적 만남 기사가 페이스북에 올랐다. 개신교 이야기가 자연스레 흘러 나왔는데 “예수를 믿고 연구하는 목사들과 신학자를 보니 신이 없는 게 분명한 거 같다”고 했단다. “목사와 신학자들이 저렇게 사는데 어찌 신이 있겠느냐”는 일갈이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고들 한다. 날아올랐으니 추락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이야기다. 그러나 추락하는 것은 지면에 닿는 순간, 부서지게 되어 있다. 무게가 많이 나갈수록 추락의 강도와 파손의 정도는 심하다. 그 위용을 자랑한 것일수록 추락의 비극은 크다. 이게 누구 이야긴가? 바로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교인들은 날로 줄어들고 있다. 한때 세계선교사의 기적이라고 여겼던 한국교회의 양적 부흥은 그 정점을 찍었고 이제는 하강의 길로 접어들고 있다. 충분히 찼으니 비워질 때가 왔다면 몰라도 이건 찼기 때문이 아니라 더는 그곳에 머물러 있을 이유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질타와 조롱의 대상이 된 지 오래이며 그래도 그걸 모르고 자기 배를 불리는 일에 전력을 다하는 교회가 부지기수다.

그럼에도 교회는 자꾸 ‘거탑(巨塔)’이 되어가고 있다. 얼마나 큰 교회인가로 목회의 성공 여부가 판가름 난다. 이름깨나 날리고 있는 교회 지도자들이 한 손에는 권력, 한 손에는 재력을 쥐고 이른바 잘 나가는 목사로 살아가고 있다. 모든 특권의 주인이 되고 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우상숭배가 있다. 말과 교리적으로는 우상숭배를 배척하면서 돈이라는 맘몬 우상이 교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 축복을 마다 하겠는가? 그런데 그 축복의 정체가 부자 되기에만 집중되어 있다면 그것은 무서운 일이다. 부자가 되는 것이 이 사회의 정의를 이루는 것보다 높게 평가된다면 그 사회는 이미 불행하다. 힘 있는 자리에 오르는 것이 그 사회의 고통을 껴안고 아파하는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삶보다 더 좋은 것으로 여겨지게 된다면 그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예수가 함께한 가난하고 힘 없는 이들은 지금의 교회에서는 환영받지 못한다. 유명한 자들이 교회의 상석에 앉고, 부자들이 대접받는다. 그렇게 해서 교회건물은 점점 더 화려해지고 있고 안으로는 돈 냄새가 진동한 채 부패에 둔감해지고 있다. 그런 곳에서 생존의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을 위로할 수 있는 힘은 나오지 않는다. 이미 낡아서 반복되는 레코드처럼 설교는 지지부진해지고 있으며 영혼을 번쩍 깨우는 말씀은 기대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남의 것을 베끼는 설교이거나 이미 한 것을 되풀이하는 설교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강단을 메우고 있다. 그러니 어떻게 그런 교회의 예배를 통해 사람들이 영적 각성과 평화를 얻을 수 있겠는가? 사회적 모순에 눈감은 채 어떤 예언자적 전통을 세울 수 있을까? 권력을 향해 입바른 소리를 하지 못하면서 무슨 하나님 나라를 운위할 수 있을까? 목회자부터 검소하고 겸손하며 낮은 자리에 있지 않는데 어떻게 교인들의 마음이 낮은 데 임할 수 있을까?

예수도 그런 교회를 보면서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무너진 교회의 터 위에 예수의 몸으로 새로운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신 뜻은 무엇인가? 그건 예수의 육신으로 드러난 일체의 사랑과 겸손, 낮은 이들과 함께 하는 자세, 세상에서 가장 작은이들을 섬기는 모습에서 그 실체가 드러난다. 화려한 거탑을 꿈꾸는 마음으로는 진정한 신앙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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