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한 신앙·영혼의 여행...가을만끽, 가슴에 남는 여행

청명한 가을 하늘을 보면 천고마비의 계점임을 다시한번 느끼게 된다. 맑고 고운 빛깔의 하늘과 넓은 들녘을 보노라면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생각이 절로난다. 사람들은 그래서 들로 산으로 나들이를 떠나는 것일까, 먹고 마시고 노는 단풍관광은 사람들을 설레게 한다. 그러나 신앙인은 어찌 그럴쏜가? 먹고 마시고 노는 여행이라도 절제의 도를 발휘하여 가을여행의 풍요로움을 만끽해야 한다. 이번 가을, 의미있는 여행으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일제 식민지 시절과 한국전쟁 속에서 순교자가 생겨났다. 자신의 신앙을 지키다 죽고 갓 태어난 한두살 여린 목숨도 부모와 함께 죽임을 당했다. 그래서 순교지는 아픔과 분노의 장소이면서 동시에 신앙의 순수성을 기억하게 하는 회상의 터전이다. 전쟁에 대한 분노, 이념이라는 굴레가 가져오는 인간에 대한 실망감 또한 생각케 하는 장소다.

성결교회의 순교지는 일제말 박봉진 목사의 순교의 흔적이 새겨진 철원과 6.25전쟁 때 66명이 순교한 병촌교회, 윤임례 집사 등 23명이 순교한 두암교회, 이판일 장로 등 48명이 순교한 임자진리교회, 그리고 문준경 전도사의 순교 흔적이 고스란히 간직된 증도의 성결교회들, 임광호 전도사의 순교흔적이 아로새겨진 하리교회 등이 있다.

이들 순교지를 다녀오기란 쉽지 않다. 순교지의 무게감이 우리를 압박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무게감에 짓눌려 발걸음을 멀리한다면 순교 신앙은 우리로부터 멀어질 것이다. 한 걸음이라도 발걸음을 내딛고 그들이 숨 쉬던 자취를 쫓노라면 그들의 신앙이 우리에게 말을 걸게 될 것이다. 올해 가족과 함께, 남녀전도회원들과 함께, 전도를 꿈꾸는 친한 친구들과 함께 가을 나들이 삼아 순교지로 발걸음을 옮겨 보자.

▲ 두암교회는 윤임례 집사를 비롯해 23명의 순교신앙이 어리어 있는 곳이다. 가을, 정읍 내장산의 푸르름과 함께 두암교회와 하리교회의 순교신앙을 느껴보자.
정읍 두암교회 / 윤임례 집사와 22인의 신앙 정신

정읍 두암교회(홍용휘 목사)는 매년 4000여명의 성도들이 순교정신 계승을 위해 찾는 곳이다. 전북 지역의 대표적인 기독교 유적지 중 하나로 윤임례 집사 등 23명이 한국전쟁 당시 순교한 곳이다.
10월 초 두암교회를 향하는 차창 사이로 노란 벼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순교의 그날, 1950년 10월 19일도 이러했을 것이다. 추수를 앞둔 들녘의 벼들은 전쟁의 참화를 부끄러워하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교통의 요충지였던 두암에도 공산군이 들어왔고, 이들은 해방 직후 북한에서의 종교탄압의 기억과 비밀집회(혹은 예배)를 갖는 기독교인을 경계했다. 자연히 ‘그들만의 모임’인 예배와 종교활동은 탄압받기 일쑤였다. 불시의 가택 수색과 연금, 두암교회를 이끄는 김용은 전도사에 대한 체포령 등은 두암교회 성도들을 옥죄어 왔다.

순교의 그날, 공산세력은 결국 김용은 전도사의 어머니인 윤임례 집사의 집에 몰려와 윤 집사를 칼로 죽이고 가족들을 방에 몰아놓고 집에 불을 놓았다. 김용술 씨와 박호준 집사 등의 가족들도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이렇게 4가정 23명의 성도들이 죽임을 당하게 된 것이다.

시신을 수습한 서명선 목사와 김용례 사모(윤 집사의 막내딸)는 “무릎을 굽힌 채 머리 뒤쪽에 칼자국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죽음에 앞서 기도하다가 순교한 것”이라고 증언한다. 그 증언 하나는 성경 속 스데반의 순교와 같이 윤 집사의 순교 현장을 생생히 전해준다.

아픈 상처는 쉽게 복구되기 어려웠다. 폐허가 된 두암에 교회가 다시 세워진 것은 1964년. 이 곳 출신인 김태곤 전도사가 주일학교를 열어 두암교회를 재건했고 가매장했던 순교자의 무덤을 이장했다. 또한 순교자 기념비도 세워졌다. 1990년대 들어서 순교자들의 무덤을 모아 ‘순교자의 묘’로 합장되었고 교단에서 사각 십자가 모양의 순교자 기념비를 새로 세웠다. 십자가를 진 채 대지를 딛고 굳게 일어선 신앙의 거인 23명을 상징하는 23단의 돌을 쌓아 올려 세워졌으며 십자가 탑 꼭대기에는 신앙의 횃불이 활활 타오른 형상이다.

두암교회를 찾는 이들을 맞는 것은 순교기념예배당과 깔끔하게 정돈된 순교자의 묘, 그리고 두 개의 기념탑이다. 묘 주변에 쓰여진 23명의 이름을 조용히 되뇌고 기념탑에 쓰여진 봉헌문과 약력을 꼼꼼히 읽어본다면 그날의 감동이 두 배가 될 것이다.

두암교회는 순교지를 찾는 성도들을 위해 영상을 준비해 상영한다. 20여분의 영상에는 담임목사의 인사말과 순교지 소개, 옛 교회 터와 순교자들의 순교 이야기, 순교 관련 증언 등이 담겨 있다. 화려하진 않지만 소박한 영상은 그날의 상황을 우리에게 쉽게 전달해 준다.
두암교회에는 소 예배실과 가족 단위로 머무를 수 있는 소규모 방이 마련되어 있어 20~30여명 소규모의 방문이라면 하루 머무르며 순교자들의 신앙을 되새기는 뜻 깊은 프로그램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하리교회 /젊은 임광호 전도사의 뜨거운 신앙

하리는 시골교회 답지않게 정원과 같은 넓은 마당을 갖추고 있어 대형 버스 3~4대가 잠시 머무를 수 있는 곳이다. 2005년에 이르러서야 순교기념비를 세웠기 때문에 기념비 외에는 순교 당시의 흔적은 찾기 어렵다. 그의 사역 흔적은 고스란히 부모의 뒤를 잇는 임창희 목사 등 유족과 임 전도사의 지도를 받은 당시 성도들, 곧 증언자의 몫이 된 것이다.

흔적이 작다고 임광호 전도사의 헌신과 순교 신앙이 사그라지는 것은 아니다. 임광호 전도사는 1950년 초 개척된 하리교회(민경휘 목사)의 첫 목회자로 교회부흥에 헌신하다가 한국전쟁 초기 공산당에게 끌려가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당시 하리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한 백한나 집사 등의 증언에 따르면 공산당은 교회건축의 중단과 신앙의 포기를 강요했고 임 전도사는 이들에게 ‘예수를 믿어야 산다’고 전도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임 전도사를 포함해 몇 사람을 어디론가 끌고 나갔고 이 때 어디선가 죽임을 당했을 것이라 여겨진다.

당시 임 전도사는 결혼한 지 4개월도 안된 신혼이었다. 눈물 속에서도 아내 김복순 사모는 임 전도사를 뒤이어 교회 건축에 전력을 다했으며 이러한 신앙은 유복자였던 임창희 목사와 후손들에게 계승되었다.
차에서 내려 교회에 들어가 기도한 후, 교회 마당 벤치에서 차 한 잔의 여유를 즐길 수 있다. 돌비석처럼 우뚝 선 순교기념비와 거기에 새겨진 순교 이야기를 한 자 한 자 읽어 내려가다 보면 임 전도사의 열정과 헌신이 오늘에 다시 살아오는 것 같다.

사실 순교지 방문은 무거운 주제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순교지라고 해서 꼭 무거워야 한다는 것은 편견이다. 지나치게 가벼워서도 안 되지만 무거움에 매몰된다면 순교지는 영원히 과거에 머물러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순교지의 과거를 회상하고 그들의 순수성과 열정, 헌신을 생각하지만 거기에서 현재를 생각하고, 미래를 다짐해야 한다. 열린 미래, 새롭게 쓰여질 신앙의 역사가 우리 앞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번 가을, 순수한 신앙을 찾아 떠나보자. 즐거운 여행과 함께 성결교인으로서 긍지와 자부심, 그리고 순결한 신앙을 회복하는 계기가 마련된다면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꼭 신앙인이 아니더라도 함께 어울리며 성결교회를 소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아는 친지들과 함께 여행코스를 잡아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한다.

찾아 가는길

하리교회는 호남고속도로 삼례 나들목(IC)로 나와 800m 직진하면 좌측에 십자가와 교회 건물이 보인다. 하리 주유소를 지나 바로 좌회전하면 된다. (063-291-2849, 011-654-4994)
두암교회는 정읍 나들목으로 빠져나와 고창 방면으로 7km 가면 소성주유소가 나오는데 여기서 좌회전한 후 소성파출소 사거리에서 다시 좌회전 후 200m 가다가 우회전 한다. 작은 이정표가 있는데 주의해서 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쉬우며 우회전 후 3km를 직진하면 왼편에 교회를 만나게 된다. (063-537-6839, 011-683-0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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