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벤구리온(David Ben-Gurion, 1886~1973)은 이스라엘 공화국의 일등 공신으로 유대인들이 모세 다음으로 존경하는 사람이다. 폴란드의 빈곤한 농촌에서 태어난 그는 학교 진학도 못한 채 20세에 팔레스타인 키부츠에서 일하면서 공부했다. 키는 155㎝의 단신었고, 배가 나오고, 추남이었고, 구변도 없는 사람이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존경할만한 외적인 조건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었지만 민족에 대한 절대적인 헌신때문에 가장 존경받는 인물의 반열에 올랐다.

헌신이란 삶의 모든 과정에서 참고 견디는 것이다. 헌신하기 위해서는 ‘선택에 충실’해야 한다. 목회를 하면서 끊임없이 선택의 기로에 서서 고민할 때가 참으로 많다. 주님, 어디까지 헌신해야 합니까? 주님, 헌신의 깊이와 길이와 넓이와 높이는 어디까지 입니까? 몸부림치며 주님 앞에 때를 쓰며 고뇌하는 거룩한 밤을 보낼 때가 있다.

우리는 그 해답을 영적 스승인 주님께로부터 다시 듣게 된다. 요한복음 13장 1절 말씀은 기로에 서 있을 때 어떻게 선택해야 되는지에 대한 분명한 선을 긋는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예수님의 헌신의 모습은 조건과 한계가 없었다. 무조건적인 사랑이셨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예수님의 헌신은 생명까지 드렸다. 생명까지 드렸기에 그분의 헌신은 인류역사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과 눈물과 또 다른 헌신을 만들어가며 교회와 시대와 사회를 밝게 만드는 것이다.

세계의 지성인들은 우리 시대를 평가하기를 ‘혼돈의 시대’, ‘위기의 시대’, ‘불안의 시대’,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부르고 있다. 분명히 이 시대는 베일에 가려진 암울함이 존재한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은 삶이 더 황폐해져가고, 다양한 상처와 눌림과 아픔과 가슴앓이로 헤매며 벼랑 끝에서 자기를 붙잡아 줄 진실한 친구를 찾고 있다. 정처 없이 방황하는 영혼들을 위해 이 시대의 영적 리더들은 더 깊은 헌신으로 사명의 길을 걸어야 함을 느끼게 된다.

영적리더들의 절대적인 헌신은 죽어가는 한 생명을 살리는 위대한 사역이 될 것이다. 헌신하는 데는 조건과 이유가 붙지 않는다. 무조건적인 드림만이 있을 뿐이다. 예수님처럼 끝까지 양떼들의 삶의 자리에 함께하는 것이 오늘 우리시대의 영적리더들의 자화상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우리의 삶의 비전이 되시는 주님을 위해 일생을 받치며 걸어가는 길은 너무도 숭고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아버지의 마음으로 성도들을 섬기며 교회를 위해 자신의 전부를 드리며 가꾸어 가는 사역은 너무도 위대한 것이기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자산이다.  

헌신은 아름답다. 영적 리더의 인생 속에서 헌신이라는 단어는 너무도 귀한 의미를 지닌다. 헌신의 기쁨을 누리고 사는 것은 축복 그 자체이다. 언젠가 인생의 뒤안길을 뒤돌아 볼 때, 남는 것은 얼마나 많이 누렸고, 얼마나 많이 가졌는가에 있지 않을 것이다. 오직 남는 것은 헌신한 삶의 발자취뿐일 것이다.
아름다운 헌신은 반드시 영적 보상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인정과 소명 성취에 대한 보상’이다.

하나님이 나의 헌신의 삶을 인정할 때 감격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슴 벅찬 감동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눈물의 헌신을 통해서 한 영혼이 살아났다면 그 영혼이 기억할것이고, 교회를 위해 자신의 전부를 드렸다면 교회가 기억할것이고, 거룩한 길을 헌신의 땀방울로 채웠다면 가족이 기억할 것이다. 황혼이 져가는 길목에 서 있을 때 스스로 거룩한 소명을 성취하였다면  너무도 행복할 것이다.

우리는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서 이 위대한 헌신을 묵묵히 주님과 함께 걸어가야 한다. 지금 헌신의 모습이 리더의 미래이고 그 영적 리더의 가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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