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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북한 인민군의 불법남침으로 시작된 6.25 전쟁은 참으로 비참했다. 전쟁준비를 못한 한국은 전세에 계속 밀렸고 7월 중순쯤에는 전라도까지 공산치하가 됐다. 이때 민간 공산분자들이 마을에 나타나 가난하고 성질이 못된 사람들을 선동해서 신자들을 괴롭혔다. 그러다 9월 하순에 아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했다는 소식에 당황한 공산분자들이 가장 먼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이기 위해 류응현 장로를 연행하려고 집으로 들어 닥치자, 승규가 아버지 대신 나서서 함열읍 유치장으로 끌려갔다. 그는 효자였다.공산분자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따로 분류해서 가두고 심문했다. 그리고 학살하기 위해 어느 날, 신자들 10여 명을 불러내어 손을 묶은 후, 산으로 데리고 가서. 어느 곳에 세우더니 손을 풀어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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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샘 기자
2015.11.04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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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대부분의 가정이 그러했듯이 류승규 목사의 집은 조상 때부터 전통적으로 내려온 유교가정이었다. 그의 집은 해마다 조상께 제사를 10여 차례 드리느라 빚을 지고 살았으나 어쩔 수 없는 유교의 폐습이었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 류응현 씨는 30세 때 삶이 송두리째 변하는 사건이 일어났다.1929년 어느 날, 응현 씨가 함열읍 장터에서 친구를 만났다. 부친은 친구의 권면으로 마지못해 그날 저녁 이성봉 목사가 인도하는 함열성결교회 부흥회에 참석했다. 류응현 씨는 이성봉 목사의 감동적 말씀과 영감어린 찬송을 들으며 그에게 매료되었다. 정말 아무렇게나 살 인생이 아니어서 그는 예수 믿겠다는 자, 손들라고 권할 때 손을 높이 들었다.이때부터 응현 씨는 10리 길을 걸어 함열교회의 공 예배에 빠짐없이 출석하다 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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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5.10.21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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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일제(日帝)의 식민정치가 극성을 떨던 1923년 5월 9일. 문화 류(柳) 씨 충경공 제32대 손 류응현(柳應鉉) 씨의 4남매 중 장남으로 전북 익산시 용안면 화정리에서 출생했다.부친은 가난한 농사꾼으로 몇 마지기 농토로 겨우 먹고 살 정도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영리하고 재치가 많았으며, 타고난 성격이 활달해서 잠시도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말썽을 부리고 장난을 잘 치는 개구쟁이였다. 그는 6세 때 동네 아이들과 함께 마을 서당에 다니며 천자문을 배웠고, 9세인 1932년 3월에 면 소재지인 용안보통(초등)학교에 입학하여 14세에 5년제를 졸업했다. 당시 고등보통(중)학교에 진학하려면 학비가 많이 들어 가난한 시골가정에서 그는 부모의 농사일을 도왔다.그는 시골이 답답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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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결신문
2015.10.06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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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세흥 장로는 평생 기도에 힘썼다. 새벽기도 자리는 사택 뒷동산이었다. 엄청난 학교 일, 특히, 설립과정에서의 그 힘겨운 일들을 오직 기도로 다 해결한 것이다. 기도의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는 그 많은 일들을 결코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임 장로는 만사를 기도로 승리한 기도의 사람이었다. 제자 정현순 장로 증언이다. “선생님께서 새벽마다 큰 목소리로 기도하셨습니다. 맑은 공기를 타고 동네로 퍼져 내려오는 그 열정적 기도소리는 온 동네 사람이 다 압니다. 선생님의 기도 소리는 마치 폭포수가 쏟아지는 듯했습니다. 그칠 줄 모르는, 그 빠르고 경쾌한 음성에는 언제나 열정과 확신이 가득했습니다. 선생님의 기도자리는 무릎으로 자국이 나 있습니다.”막내딸 임희덕 집사의 증언이다. “기도하러 올라가며 아버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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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수 목사(상개중앙교회)
2015.09.23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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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농업고등학교의 특징은 전국 각지 원근 각처에서 학생들이 모인다는 점이다. 이는 교장선생님의 정신과 교육철학, 그의 명강의, 유명한 약초원과 훌륭한 교사들 덕분이다. 임세흥 장로의 후생학 강의는 특히 유명했다. “선생님은 한국교육과정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후생(厚生-행복하고 넉넉하게 살아가는 삶)이라는 과목을 만들어 직접 강의하셨다. 중심 내용은 덴마크개척정신을 소개하는 것이지만, 내용은 광범위하다. 한국인이 고쳐야 할 점을 지적하시면서, 생각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라고 강조하였다. 선생님의 인생관, 신앙관이 이 시간에 다 나왔고, 약초식물강의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다. 가장 인기 있는 수업시간이었다.”(신민교 박사 증언)학생들은 학교를 개척해 가는 과정에서 땀의 가치를 배우고, 신학문 학습과 함께 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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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수 목사(상계중앙교회)
2015.09.09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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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세흥 장로는 원래 만주에서부터 본초학(약용식물학) 학자였다. 한국에 온 후에도 그의 실력은 유명했다. 서울대학교 교수이면서 동양의학관(경희대학교 한의대 전신)과 단국전문학관에서도 한의학을 강의한 신길구 선생은 당시 한국의 본초학 권위자였는데, 임 장로는 신길구 선생과 약용식물학에 대하여 보건신문 등에서 지상논쟁을 벌인 라이벌이었다. 대신중·농업고등학교 출신으로 임세흥 교장의 제자요, 원광대 한의과대학장을 지낸 신민교 박사가 자신의 저서‘임상본초학’에서 ‘본초학의 역사-근대한국 본초사’를 소개하는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신길구 선생과 함께 임세흥 장로를 그 효시로 소개한 것을 필자가 ‘인물전’에서 인용한 바 있다. “국산본초연구에도 공헌하고 농촌 잘 살기운동을 직접 계몽하면서 실천했던 임세흥(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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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수 목사
2015.09.02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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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후포리 뒷골 730번지, 지금의 후포교회 자리에 있었다. 한일자로 지은 초가한옥 한 채와 일제시대에 면사무소로 쓰던 기와집으로 당시로는 그만했다. 임세흥 학원장의 한의원 소득이 보태지면서 학교가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듬해(1949년) 7월에 드디어 제1회 중학원 졸업생 29명을 배출했다. 신복성 장로가 여주군에서 불하 받은 15만 평 뻘밭의 땅콩농사로 학교형편이 더 좋아져 1952년 봄에 후포리 258 번지, 지금의 대신중·고등학교자리 일대의 6만 평을 학교부지로 구입하였다. 그리고 후포교회 교인과 주민의 노력봉사로 터를 닦고, 교실을 신축하기 시작했다. 실로 혁명에 버금가는 엄청난 역사였다. 두 분의 간절한 기도와 노력으로 1953년 4월 20일 재단법인 대신학원 인가를 받고 7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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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수 목사(상개중앙교회)
2015.07.22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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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세흥(林世興) 장로는 1905년 10월 12일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출생하여 신의주 광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만주 봉천으로 이주하여 1941년 봉천사범학교를 졸업했고, 공립 공태보농업중학교 교장과 계림자연대학 식물연구소 소장으로 재임하면서 본초학(本草學-중국 고래의 식물학, 약물학)을 연구하며 후학을 가르쳤다. 그는 사형제 중 차남으로 서울 서소문교회 사택에 기거하면서 YMCA와 연계해 전국을 다니며 민족의 장래, 농촌문제와 약용식물 활용에 대한 강연을 했다. 두 동생도 각각 경북의과대학 이비인후과 교수와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교수가 됐다.척박한 농촌을 택한 선각자여주에서 신복성 장로가 소문을 듣고 임세흥 장로를 찾아왔다. 그는 후포교회 장로로 여주·양평·이천 지역 일대에 고구마를 보급하여 주민의 굶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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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수 목사(상개중앙교회)
2015.07.08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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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천 목사는 안동지역 복음화에 열정이 있어서 안동지역의 교회 연합사역에 앞장섰다. 단군동상을 철거하다가 투옥된 영주지역 교계지도자들의 무죄석방을 위해 어깨띠를 두르고 앞장서서 안동지원까지 가두캠페인을 하면서 데모도 했다. 그의 소탈한 성품과 젊은이 못지않은 패기와 안동지역복음화의 열성이 있어서 안동교계가 그에게 안동횃불회의 소임을 맡겼다. 지 목사는 농촌교회목회자의 지속적인 교육을 절감하고 서울 횃볼회의 지원을 이끌어냈다. 강의는 연중 2학기로 나눠 1학기는 3~6월, 2학기는 9월~11월에 실시했다. 초청된 강사는 안동의 예장 증경총회장 김기수 목사를 비롯하여 한국 교계의 저명한 목회자와 신학자 등 저명인사들이었다. 수백 명의 수강자가 참석하는 등 농촌교회 목회자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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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전 본지주필)
2015.06.24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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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촌교회는 보육원 신망애 애육원과 함께 세운 교회였다. 지성천 목사는 성 다미엔이나 조지 뮬러처럼 일생을 헌신하고자 기도했다. 지 목사의 점촌교회에서의 4년간의 목회는 잃어버린 자, 가난한 자, 가족에게 버림받은 불쌍한 고아들을 위해 아버지로서의 눈물을 흘린 목회였다. 점촌교회가 점점 부흥되면서 고아원 밖에서 오는 성도들과의 갈등의 조짐이 생겨났다. 또한 그 지역의 유력한 장로가 시내요지에 지역을 대표하는 중심적인 성결교회를 세우려고 했다. 지 목사는 그 비전이 실현되기를 희망하며 점촌교회를 사임하고 장항동부교회로 부임했다. 장항동부교회에 부임한 지 목사는 새벽기도회를 강화하여 부임 1개월 만에 60명이 참여했고 100명을 목표로 캠페인을 벌여 기도의 불이 붙었다. 교회는 은혜의 분위기로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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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전 본지주필)
2015.06.10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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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천 목사는 비안 소보 구역교역자회를 결성하여 지역 교육자들과 어우르며 그들과 일심동체가 되어 상부상조하는 목회를 했다. 지 목사가 사리, 후천, 소보, 이두교회 치리목사로 활약하면서 교역자 상호친목, 공동목회연구, 생활문제까지 함께 생각하며 상부상조할 목적으로 ‘군위감찰구역비안소보구역교역자회’를 조직하여 매월 마지막 월요일마다 예배와 친교 각 교회와 목회자간의 당면문제를 헤쳐 나갔다. 지 목사는 어려운 교회를 도와줬다. 도울 재원이 없으면 후원자를 구해서 연결해줬다. 농촌교회자립과 부흥성장을 위해 ‘농촌목회분과’ ‘기독교교육 분과’를 두어 분야별로 연구했으며 7개의 강령을 정했다. 강령의 골자는 눈물, 피, 땀, 생명을 바치며, 구농(救農)결사기도, 수도자의 청빈, 성령 충만 사랑의 목회, 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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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전 본지주필)
2015.06.03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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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천 목사의 목회는 눈물의 목회로 점철되었다. 농촌 목회 시절에는 피폐된 농촌을 위해 눈물의 목회를 했다. 농민학원의 설립과 ‘상록회’를 조직하여 활동하는 등 농촌운동가이기도 했다. 보육원과 함께 설립한 교회에서는 잃은 자, 가난한 자, 가족에게 버림받은 불쌍한 영혼을 위해 눈물을 흘렸다. 모자원과 함께 설립한 교회에서는 피폐된 농촌과 전쟁고아, 희생자 부인을 위해 눈물을 흘렸다. 마지막 목회지 안동교회에서는 나 같은 죄인을 목회자로 세워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며 47년간 파란만장한 눈물의 목회를 했다.지 목사는 1937년 5월 5일 경북 상주시 서성동 60번지에서 부친 지점백 씨와 모친 최월심 씨의 2남 2녀 중 2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47년 초등학교 4학년 때 상주성결교회에 입교했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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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전 본지주필)
2015.06.01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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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부흥을 위해 몸 바쳐 일해야 한다. 그래서 교회에 여러 가지 직분이 있어 봉사하게 한다. 그런데 목회자의 부인은 교회에서 직분이 없다. 그저 ‘사모’라는 성경에도 없는 이름으로 대접상 부르고 있을 뿐이다. 담임 목사나 부교역자의 부인들이 직분을 받아 교회의 일에 전면에 나서는 것이 문제가 될 수도 있겠지만, 이를 부정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정음전 사모는 이런 교회의 전통적 편견을 깨고 생전에 2개의 교회 직분을 받는다. 먼저 1967년 출석하는 신촌교회에서 집사 직분을 받았다.당시 조 박사가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서울신대 교수로 부임하자 온 가족이 신촌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고, 곧 그녀는 신촌교회에서 정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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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전 본지 편집위원장)
2015.05.20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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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먼저 학장의 부인으로서 남편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내방객이나 외국인들의 접대에 관한 책들을 읽고 조금도 소홀함이 없이 각종 매너를 빠르게 체득해 갔다. 그러다 그녀는 남편을 위한 최선의 내조가 중보기도임을 알았다. 출애굽기 17장에 이스라엘 민족이 아말렉과 싸울 때 승리의 비결이 배후에서 모세의 손을 붙드는 아론과 훌의 기도에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기도의 영성으로 남편의 사역을 돕는 것이 최선임을 알고, 아침저녁으로 기도에 매달렸다. 조종남 학장과 함께 오랫동안 사역했던 이기홍 목사(전 사무처장)는 정음전 권사의 기도생활에 대해 “조종남 박사께서 탁월한 신학자이면서 행정가로 큰 업적을 남기신 배경에는 권사님의 간곡한 기도가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특히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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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전 본지 편집위원장)
2015.05.06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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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가족은 친정집에 얹혀 살았지만, 가족의 생계를 위해 그녀는 길거리에서 내복을 팔았다. 당시 그렇게 장사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수익은 별로였으나 한 푼이라도 벌기 위해 여름 겨울가리지 않고 날마다 계속했다. 1953년 봄에 황해도 피란민들이 많이 다니는 인천 송현교회에서 교인들이 최경애 전도사를 찾는다면서 시어머니를 여전도사로 청빙하였다. 그녀는 아이들과 함께 시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인천으로 갔고, 남편은 부산의 신학교 천막기숙사에서 동료들과 함께 자고 먹고 공부했다. 가족의 시급한 생계가 우선 해결되자 그녀는 성도들의 형편을 헤아리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새삼 깨닫고, 날마다 감사 기도와 찬양의 생활을 했다. 이때부터 그녀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4남매를 양육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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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전 본지 편집위원장)
2015.04.08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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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방 끝날 것 같던 전쟁이 3년 간 계속되었다. 적의 치하에서 언제 어느 순간 공산당에게 봉변을 당할지 알 수 없는 두려움과 굶주림을 참아가면서 시조부 내외와 시어머니, 조카들과 어린 아이들을 돌보아야 했던 그녀의 삶은 참으로 눈물겨운 것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견딜 수 없는 것은 남편의 생사였다. 기대할 수 있는 오직 하나님 밖에 없어 그녀는 자나깨나 전심으로 기도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뜻밖에 동네에 애련이란 처녀가 그녀 앞에 나타나 피란을 간 남편의 소식을 전해 주었다. 애련이는 민첩해서 전란 속에서도 쪽배를 타고 다니며 고향과 인천을 왕래하면서 작은 수고비를 받고, 서로간의 소식을 전해주는 당찬 처녀였다. 애련이가 인천에서 그녀의 남편을 만났으며 편지와 돈 얼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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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전 본지 편집위원장)
2015.04.01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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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1월 감리교의 조신일 목사의 부흥회에 참석했다가 은혜를 받은 남편은 회개를 통해 구원을 확신하고 주님의 종이 될 것을 서원했다. 그러나 그가 그동안 목도한 목사들의 형편없는 경제생활은 그로 하여금 헌신하기를 망설이게 했고, 가족의 생계에 대한 책임과 애착이 있어 직장생활은 최선을 다하면서도 교역자가 되는 것은 차일피일 미루기가 일쑤였다.“꼭 목사가 되어야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 아니잖는가?”이런 식으로 그가 헌신을 회피할 때마다 그의 어머니와 아내 정음전은 그의 헌신을 위해 간곡하게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편이 어느 날, 서울 출장을 갔다가 시간이 있어 본 어느 영화가 그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내용은 결혼하고 자녀를 둔 한 청년이 어렵고 고달픈 환경을 뚫고 열심히 공부해서 마
일화이야기
류재하 목사(전 본지 편집위원장)
2015.03.25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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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음전 권사는 1927년 9월 26일 황해도 장연군 속달면 영서리에서 유학자로 널리 알려진 정윤근 씨와 이임덕 씨 사이에서 5남 3녀 중 둘째 딸로 출생했다. 그녀의 가문은 전통적으로 유교를 신봉하는 사대부의 가정이었으나 그녀는 보통학교를 진학하면서부터 교회에 남몰래 다니며 믿음을 키웠다. 그녀의 고향 장연(長延)은 한국에 외국인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 이곳 출신 서상륜이 인삼 장사 차 북경에 갔다가 영국인 존 로스 선교사에게 전도 받고 세례 받은 후 그의 협력으로 누가복음을 한글로 번역하고 출판한 성경을 고향에 가져와 전도하여 자기 집에 한국 최초의 교회 솔내(松川)교회를 세우고 전도하여 군 일대 마을마다 교회가 세워진 곳이었다.그녀는 보통학교를 마친 후 1940년 황해도 사리원고등보통여학교에 입
일화이야기
류재하 목사(전 본지 편집위원장)
2015.03.18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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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9월 18일, 오전 10시, 유관순 기념관에서 과학적인 봉사 실적 검토와 엄격한 심의를 거쳐 뽑는, 한국 여성으로서 최고의 명예인 용신(容信)봉사상의 수상자로 정중흥 권사가 선정되었다. 그는 우리 성결교단을 빛내며 용신봉사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부상은 컬러 TV와 상금 100만 원이었는데, 상패 외의 TV와 상금은 다른 곳에 헌납하였다. 이때 상을 받으면서 그녀는 “이런 상을 받다니 황송하다”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용신봉사상은 한국여성단체협의회가 소설 ‘상록수’의 실제 모델인 최용신을 기려 사회봉사에 공이 큰 여성에게 매년 전국 여성대회(이화여고 내 류관순기념관)에서 시상해 온 상이다.그는 삼성애육원 외에도 중학교 시절부터 YWCA에 가입하여 30여 년 동안 사회의 빛이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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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왕근 목사(공주 대신교회)
2015.03.11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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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들을 먹이고 입히고 양육하는 데는 중동교회 김용은 목사의 도움이 컸다. ‘삼성애육원’이라는 이름을 지을 때도 그는 담임목사인 김용은 목사와 상의하여 지었다. 김용은 목사가 여기저기 주선하여 도청에 등록하고 기독교아동복지회와 세계구호위원회에 가입되어 구호물자가 들어오게 하여 형편이 조금씩 나아졌다.초창기에는 모든 것을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했기 때문에 그의 모든 자녀들이 함께 고생을 극심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CAC 책임자 세베지 씨의 도움은 애육원 살림에 큰 보탬이 되었다. 그리고 신창동에 600평의 대지를 구입하고 부속시설을 확장하여 삼성애육원은 좀 더 크고 안정적인 운영을 할 수 있게 되었다.현재 삼성애육원에는 영아로부터 청년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포를 이루며 대식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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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왕근 목사(공주 대신교회)
2015.02.25 1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