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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상준 목사의 목회 특징 중 하나는 교인들의 염습을 도맡아 하는 것이다. 한 분, 한 분, 땀을 비 오듯이 흘리면서도 정성껏 고인이 된 성도들의 몸을 닦아 주었다. 그것을 본 유가족들과 나이 많은 성도들은 “나도 세상을 떠나면, 유 목사님이 꼭 내 몸을 염습해달라”고 했다. 그가 염습을 잘한다는 소문이 나자, 철도사고 등으로 무연고 시신이 생기면, 당국에서 유상준 목사에게 염습을 부탁했다. 그러면 그는 시신을 깨끗이 정성스럽게 염습하고 장례를 잘 치러주어 모두들 감탄했다. 화지동에 있던 교회가 좁아서 반월동의 미나리 밭을 구입해 교회건축을 시작했다. 온 교회 성도들이 기도하며 벽돌을 날라서 몸을 아끼지 않고 열정으로 교회건축이 되어갔지만, 건설업체가 부도가 났다. 그러자 그는 큰 아들이 사는 집을 팔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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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왕근 목사(공주 대신교회)
2018.10.04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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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걷이를 마친 11월에는 전교인들이 지게, 달구지, 낫, 톱, 도끼 등을 챙겨 근처의 산으로 갔다. 겨울을 나기 위해서 난로 땔감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이런 일에도 앞장을 섰지만, 은혜를 받은 성도들이 자진해서 섬긴 봉사였다.그 해 겨울에는 유명한 부흥강사 이성봉 목사님을 모시고 부흥회를 개최하여 지역의 유지, 학교 교장, 의사 등을 교회로 초청해 미당교회는 날로 부흥하였다. 총회에서 선교사들이 방문할 때는 폭스바겐차를 운전해 오기도 했고, 또 언젠가는 마을 냇가에 헬기가 착륙했을 땐 온 마을 사람들이 처음 보는 헬기를 구경하기 위해서 미당지역 전체가 떠들썩하게 모여들기도 해서 그 덕에 교회의 위상이 날로 높아져 갔다.유상준 목사는 1963년 7월에 논산교회로 부임하였다. 당시 논산교회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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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왕근 목사(공주대신교회)
2018.08.29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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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들이 한 해 농사를 마친 농한기를 맞이해서, 규암교회는 부흥회를 개최하였다. 강사의 설교 말씀을 듣기 전에 부르는 찬송에서부터 은혜가 임하기 시작했다. 특히 찬송가 중에 보혈찬송을 힘차게 부르며 박수를 쳤는데, 나무 장작을 떼는 난로의 열기 때문이 아니라, 성도들이 부르는 찬송의 뜨거움이 교회 안을 태우고 있었다.“구주의 십자가 보혈로 죄 씻음 받기를 원하네, 내 죄를 씻으신 주 이름 찬송합시다.” 박수를 치며 계속적으로 부르는 찬송의 능력에 유상준 집사는 마침내 마음이 뜨거워지며 회개의 눈물을 쏟아냈다. 주먹으로 아무리 눈물을 닦아 내도 눈물은 멈추지 않고 눈물범벅이 되었다. 강단에서 외치는 부흥강사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는 유상준 집사의 심령을 흔들었다. 유상준 집사는 회개하고 또 회개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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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왕근 목사(공주대신교회)
2018.08.08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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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준의 아버지 유진술 씨는 아들의 결혼을 생각했다. 마침 이웃에 살면서 허물이 없는 벗으로 가깝게 지내는 송도현 씨와 이야기 하던 중 평소에 마음에 두고 있는 며느리 감을 털어놓았다. 그 규수가 바로 송씨의 큰 딸인 재영 양이었다. 당시 일제는 동남아 일대에 진출하여 싸우고 있는 군인들을 위로하는 차원에서 조선의 소녀들을 꾀어 정신대로 차출해서 강제로 끌고 갔다. 딸을 가진 부모들은 결혼을 일찍 시켜야 정신대 차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런 사회적 악한 정책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재영 양의 아버지 송도현 씨는 혼사의 말이 나온 김에 유상준과의 혼인을 서둘렀다.일제는 전쟁의 막바지까지 발악을 했지만 미국을 비롯한 서양의 연합군을 당할 수 없어 마침내 1945년 8월 15일, 일본 왕이 항복하므로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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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왕근 목사(공주 대신교회)
2018.07.18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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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햇살의 뜨거운 기운이 조금 식어진 초가을 날, 야생화는 들녘과 산에 지천으로 피었다.겨울이 지난 봄 만큼이나 여름이 막 지나고 있는 9월은 꽃의 계절이다. 가시박, 고마리, 괭이밥, 낭아초, 도깨비바늘, 닭의장풀, 비수리, 박하, 여뀌, 익모초, 달맞이꽃, 참취, 벌개미취, 구절초, 쑥부쟁이, 들국화, 등이 피어 9월의 산하는, 하늘 정원처럼 아름다웠다. 유상준(兪相俊)은 부여의 규암면 나복리 기계 유씨의 씨족 마을에서 유진술 씨와 권용순 여사 사이에서 3남 2녀 중 맏이로 1928년 9월 6일 출생하였다. 부여는 백제의 수도로서 그 자취는 찾아볼 수 없지만, 나무의 뿌리처럼 깊은 선비정신이 남아있었다. 전통과 관습이 중요시 되었던 조선시대를 지나면서 유교적인 분위기가 강한 마을에서 유상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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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왕근 목사(공주 대신교회)
2018.06.20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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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전도열매‘원산송흥리교회와 후손, 그리고 후포교회’가 그의 열매다. 지금 천국에 있을 송흥리교인들과 한국에 남겨진 후손 신자들이다. 특히, 후포교회가 81년 동안 길러낸 수많은 구원의 백성과 후포교회에서 믿음을 가진 분들에 의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 이것이 그의 가장 큰 열매다.송흥리교회를 간략히 소개한다. 지금은 농촌지역이지만, 1936년 설립 초기부터 급성장하여 한때는 경기도 내의 본교단교회 중에 대여섯 번 째가는 교세를 자랑하였으며, 1970년대까지 만해도 여주·이천·양평지역 성결교회에서 여러모로 중심역할을 했다. 교역자도 20여 명 이상 배출했고, 근동의 율촌교회(현 예성 대신교회), 상구리교회(현 벧엘교회), 천남교회를 분립지교회로 세웠으며, 하자포교회(현 개군교회), 계전교회, 왕대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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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수 목사(상개중앙교회)
2018.06.14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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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물질투자이다. 원산에서부터 광목 같은 생필품과 명태 등 해물을 가져와 집집마다 방문하며 나눠주니 주민들로부터 굉장한 호응을 얻었다. 이렇게 1년에 몇 차례씩 다녀갔다. 자신이 가난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던 것이 불행이며 저주였다고 생각하는 그는 그저 모든 것을 투자해서라도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전해줘야만 했다. 고향의 형제들이 원산에 와 살게 한 것이나 동네 분들이 그의 집에 들끓으며 그를 의지한 것도 다 그의 열정전도의 증거들이다. 둘째, 대상자 직접접근이다. 그의 전도는 선별이 아닌, 호호방문이다. 가난하게 자란 그가 성공하여 고향 분들을 호호방문인사하며, 물질적 도움을 주면서 전도할 때 그 결실은 실로 컸다. 셋째, 능력전도에 있다. 축호전도하면서 능력 있는 기도로 사탄을 물리치고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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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수 목사(상개중앙교회)
2018.05.09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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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치정의 신앙생활신치정은 신앙생활에 매우 열심이었다. 아예, 교회밖에 모를 정도였다. 그가 있는 곳은 늘 교회였다. 또한 기도생활에 힘썼다. 교회에서 새벽기도를 마친 다음에는 옛날에 봉화 불을 비춘 산이라는 봉수동 산에 올라가 기도했다. 때로는 새벽 3시에도 갔다. 하루도 빠지는 날이 없었다. 눈이 푹푹 쌓인 날은 장화를 신고 갔다. 봉수동 산에 기도자리 바위가 다 닳았을 정도였다. 특별기도 제목은 일본이 얼른 망하라는 것이었다. 부흥회 같은 때 교회 새벽기도회가 늦어지면 신치정 영수의 산기도도 늦어졌다. 외손녀 윤영희는 할아버지의 봉수동 산기도에 따라가서 기도하는 모습을 가까이서 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저녁에는 성경을 읽고 후포리로 편지를 썼으며, 종종 윤영희 본인이 대필했다고, 그리고 동생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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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수 목사(상개중앙교회)
2018.05.02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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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원산에서, 신치정은 ‘천정마을’에 샘물을 길어다 주었다. 말하자면 타향에서 물장수 일부터 시작한 것이다. 가난하고 의지할 데 없는 소년에게는 천박해 보이나 건강과 노력으로라면 가능한 이 일이 안성맞춤이었으리라. 소년은 배를 골리면서도 꼬깃꼬깃 푼돈을 모았다. 닥치는 대로, 아니 일감을 구해 다니며 부지런히 일했다. 당당하게 잘들 사는 일본인마을에서 이 골목 저 골목을 다니며 새벽부터 식당을 돌고 음식물쓰레기를 가져다가 돼지를 키우기 시작했다. 모으고 모은 돈을 털어 송아지를 샀다. 양계도 시작했다. 농촌에서 자란 소년은 일확천금은 모르고 농촌 식으로 살금살금 일어나더니, 어느 샌가 먹고살만해졌다. 교회 봉사도 점점 넉넉해지고 이웃사람들을 챙기기도 했다. 소년은 어느 정도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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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수 목사(상개중앙교회)
2018.04.25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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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집안 막내로 태어난 신치정은 13세 소년으로 가출하여 머나먼 타향에서 자수성가했다. 그러는 동안 예수를 믿었으며, 구습을 타파하고 귀감이 될 만한 신앙인이 되었다. 교회를 설립하고, 중직이 되어 충성을 다했다. 그리고 꿈에도 그리던 고향 땅에 돌아와 전도하여 교회를 설립했다. 경기도 여주 후포교회다. 후포교회를 설립하기 전, 원산에서 장로교회 ‘영수(領袖)’의 직분을 받았는데, 후포교회에서는 지금도 보통 ‘원산할아버지’로 통한다.1. 출생과 성장19세기 후반, 서구열강들은 상품시장과 원료공급지를 얻기 위해 아시아를 침략한다. 조선도 프랑스, 러시아, 독일, 미국 등에게 통상을 요구받으나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맞서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의 큰 사건을 치른다. 1875년에는 일본 함정 3척이 부산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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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수 목사(상계중앙교회)
2018.03.28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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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5 성결인대회’1998년 IMF외환위기로 나라가 흔들릴 때, 총회장으로서 ‘3·25 성결인 대회’를 통해 영적각성운동을 벌였다.1998년 3월 25일에 거행된 ‘3·25성결인대회’에는 3만여 명이 모여서 나라와 민족의 죄를 책임지는 중보적인 회개의 제단을 쌓았다. 또한 사랑실천으로 2,000명 이상의 헌혈과 18톤의 의류수집과 2억 원의 실직자 지원헌금을 전달하여 좋은 교계의 모습을 보여줬다. 회개운동에는 실천적 신앙이 뒤따랐다. 외환위기극복을 위한 ‘금 모으기 운동’, ‘옷 모으기 운동’, ‘헌혈운동’ 등을 병행했고 실직자들을 위한 성금기탁 등 사회적 고통을 분담했다.이러한 3·25구국기도회는 성결교회의 정체성과 우리교단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자긍심을 깨우쳐주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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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전 본지주필)
2018.03.14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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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돈 목사는 교육목회에 큰 관심을 가졌다. 은평교회 부임 후 첫 주일에 부임설교를 하고 은퇴할 때까지 창세기 1장부터 시작하여 성경전권의 강해설교를 통해 교인들을 양육했다. 주일낮예배, 저녁예배, 수요일예배, 새벽예배에도 줄곧 연속으로 강해설교를 했다. 성도들은 강해설교에 익숙해져 말씀으로 훈련받아 교회가 건전하게 부흥되었다. 이 목사는 강해설교는 본문이 이미 정해져있기 때문에 설교본문설정이 용이하고, 성경본문에서 벗어나지 않는 성경중심설교이며 성경본문에서 신자에게 전할 메시지를 찾아내는 훈련이 되는 장점이 있다고 했다. 이 목사는 1980년대 초부터 새신자의 정착을 위한 양육교재와 지속적인 평신도 사역자 양성을 위하여 제자훈련에 힘썼다. 성경공부교안을 직접 만들어 모든 부교역자를 성경공부와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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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결신문
2018.01.04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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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회에서 이병돈 목사가 안수기도를 하면 난치병이나 불치병도 치유되는 신유의 역사가 나타났다. 또한 방언을 비롯한 여러 가지 영적 은사들도 나타나 400명이 오르내리는 교회로 성장했다. 그러면서 이 목사는 1년에 35회, 40회 부흥집회를 인도하는 유명한 부흥강사가 되었다.1975년 이 목사는 서울의 은평교회의 청빙을 받았다. 부임당시 은평교회는 수원교회 교세의 3분의1 정도였으나 대도시에서 복음사역의 큰 비전을 품고 교회부흥에 매진했다. 이 목사는 부임한 주일저녁부터 1주일간 부흥집회를 인도했다. 부임부흥회를 하는 첫날부터 175명이 등록하여 교회가 새로운 힘을 얻어 부흥성장의 동력이 생겼다. 이 목사부임 전에 6~7개월 동안 강단을 맡아준 김홍순 목사를 원로목사로 추대하여 부자지간처럼 좋은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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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전 본지주필)
2017.12.27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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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홍종현 목사가 부여교회로 부임하게 되자 은산교회는 이병돈 전도사를 담임으로 전격적으로 청빙했다. 그는 1965년 총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은산교회는 성령사역이 강한 교회였다. 저녁이면 30~40명 신자들이 교회의 장의자에서 기도하다가 자고 가고는 했는데 그들은 성령이 충만하여 방언 등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었다. 방언을 못하던 이 목사는 교회의 지도자로서 성령세례의 절실함을 느껴 6개월 이상 기도원과 산기도, 교역자수련회 등을 찾아다니며 성령세례를 간구했다. 계룡산 천막집회에서 소낙비가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홀로 높은 산 위에 올라가 굴 속에서 6시간 기도하다가 뜨거운 눈물을 쏟으며 성령의 능력을 체험했다. 이 목사는 성령세례를 체험한 후 신자들을 대할 때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목회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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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전 본지주필)
2017.12.13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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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목사 부부를 중매한 분은 은산교회의 장수완 장로(한국성결신문 사장 장광래 장로의 선친)였다. 장 장로는 이 목사 부부가 어릴 때부터 신앙을 지도했고 또한 사모와 가까운 한 집안간이다. 장 장로는 훗날 이 목사를 고향 은산교회 목회자로 청빙하여 목회사역에 적극 협력하며 은산교회 부흥에 기여했다. 1958년 신학교 3학년 시절에는 마포구 수정(현 동덕)교회에 부임했다. 수정교회는 김봉업 장로가 부산수정동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13가정 40여 명의 신자들을 주축으로 개척한 교회였다. 지붕은 천막으로 덮었고 각목을 세워 판자를 붙이고 밖에는 얇은 판자로 어긋나게 붙여 세운 교회건물이었다.이 전도사 부부는 성도들이 성미를 모은 쌀과 얼마의 자급으로 근근이 끼니를 이어갔다. 이런 사정을 모르는 신학생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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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전 본지주필)
2017.11.22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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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돈 목사는 1935년 8월 20일 충남 부여 은산면 신대리에서 부친 이창오 집사와 모친 이상금 집사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의 가족들은 조모 송신일 집사의 영향으로 일찍이 예수를 믿었다. 송 집사는 종종 병돈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주의 종을 보내주옵소서. 이 손자가 자라서 목사가 되기를 소원합니다”라고 기도했다. 이병돈은 한 때 신앙생활을 중단한 때도 있었는데 초등학교와 교회친구였던 황인탁(장암교회 명예목사)의 권고로 다시 교회에 출석하여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했다. 그는 중학교 2학년 때 이명직 목사가 인도하는 부흥집회에 참석해 재림설교에 감동받고 중생체험을 했다. 이후 그는 부활절이나 성탄절 때에는 학교를 결석할 정도로 교회 일에 적극적이었다. 그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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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전 본지주필)
2017.11.08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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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 제39회 총회장 당선과 활동영역 확대 1984년 4월 24일 교단 총회가 개회되어, 총회장 투표에서 이만신 목사가 제2차 투표를 통해 총회장 당선이 확정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 55세로, 패기가 왕성한 시기였다. 마침 그때가 기독교 100주년 기념의 해였기 때문에, 성결교회 총회장으로 초교파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했다.총회적으로는 그가 소견발표 때 제시한 ‘해외장학위원회’를 교육국에 설치하여 1차로 유학생 20명에게 연 1,000달러를 지불하기 시작했다. 현재는 40명에 연 3,000달러를 지불하여 우리 교단에 해외유학파 교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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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7.09.20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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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의 기회를 힘입어 중앙교회는 1975년 10월 26일 ‘교인 1,000명 주일예배 돌파’행사를 거행, 성공하므로 대교회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하지만 주일마다 좁은 교회당은 북새통이어서 교회의 증축문제가 당회에서 거론되기 시작했다. 이만신 목사는 기도 중 기왕이면 무교동을 벗어나 새로운 개발지역인 강남으로 교회를 이전할 것을 검토했다. 그래서 당회에서 의논한 결과 현 무교동 대지 매도를 전제로, 2가지 안을 확정했다. 1안은 강남 개발지역의 대지를 매입하고 이전 신축한다, 2안은 1안이 성사하지 못할 경우 강북 4대문 안에 대지를 매입하고 신축한다는 것이다.그래서 건축준비위원들이 강남에 가서 여기저기를 탐색했으나 대지 값이 너무 비싸 구입하기 어려웠다. 당회는 할 수 없이 1안을 철회하고, 2안
일화이야기
류재하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7.09.13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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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40일 금식기도 소식이 퍼지자, 그는 초교파적으로 부흥회 강사로 초청되기 시작했다. 그는 큰 교회 작은 교회 가리지 않고 초청 순서대로 가서 열심히 외치고 가르쳤다. 그래서 신자들이 회개하고 성령을 체험하므로 교회가 변화되고 새로워졌는데, 부흥회의 주제는 중생과 성결이 핵심이었다. 필자가 부평신촌교회 부목사로 청빙되어 간 1967년에는 한달에 4번 이상 거의 매주 마다 초청 받아 전국을 누비는 부흥회의 떠오르는 스타가 되어 있었다. 1971년 5월에 그는 성결교회 모교회인 서울 무교동중앙교회 황성택 목사의 요청으로 창립 64년 기념부흥회를 인도했다. 큰 은혜가 임하여 신자들의 회개가 터지고 새로운 은혜체험이 속출했다. 은혜 받은 신자들이 십일조와 주일성수를 통해 복을 받겠다고 스스로 서원했다.
일화이야기
류재하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7.09.06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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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신은 졸업반이 되자, 여자동기생의 중매로 부평제일교회 이정말 처녀와 만나 4개월 만인 1955년 11월에 결혼했다. 이정말 사모는 전북 완주 출신으로 향학열과 생활력과 신앙심이 강해 고학으로 보육학교, 간호학교, 양재학교를 졸업해 자격증을 3개나 지닌 당찬 규수였다. 그는 12월에 전남 신안군 압해중앙교회 담임 전도사로 부임했다. 섬마을 치고 주일마다 170명이나 모이는 큰 교회였던 그의 첫 목회지는 은혜롭고 행복했다. 그러나 이듬해 봄에 그에게 군목 입대영장이 나왔다. 그는 할 수 없이 교회를 사임하고, 아내를 친정인 부평으로 가게 한 후, 광주 보병학교로 입대했다. 하지만 그는 1차 신체검사에서 ‘건성 늑막염’을 진단받아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그는 할 수 없이 부평으로 가서 단칸방을 살림을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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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7.08.30 1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