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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결인의 절반가량은 종교인 과세를 예정대로 내년부터 시행해야 한다는 입장인 것으로 나타났다. 본지가 종교인 과세와 동성애에 관련해 성결인을 대상으로 긴급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예정대로 종교인 과세를 내년부터 시행해야 한다'는 응답이 47.4%로 가장 높았다. 반면 내년 시행을 ‘유예해야 한다’는 응답은 19%, ‘시행해서는 안 된다'는 16.1%, ‘자발적으로 납세해야 한다’는 응답은 13.4%로 나타났다. 나머지 4.1%는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이번 조사는 지난 9월 1~4일 전국 성결교회 목회자와 장로 등 성결인 685명을 대상으로 SNS를 통해 실시한 것이다. 전체 응답자 중 목회자는 67.5%, 평신도는 32.5%이며, 40대 응답자가 32.1%로 가장 많았고, 50대가 25.5%로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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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결신문
2017.09.06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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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빙글리와 루터는 성찬 문제로 갈등했고, 1529년 마르부르크에서 양측은 종교대화(Marburger Religionsgesprach)를 통해 서로의 차이를 조율하기 위해 노력했다. 성찬에 그리스도가 임재하느냐 아니면 단순히 성찬은 그분을 기념하는 공동체의 행위냐는 것이 논쟁의 쟁점이었다. 이 회의는 황제와 가톨릭 제후에 맞서 종교개혁 진영의 단일함을 만들기 위해 헤센의 영주 필리프의 요청을 만들어졌으며, 당대 스위스와 독일 대표 신학자들이 대부분 참석한 신학적 대화의 장이었다.회담이 열린 란트그라펜성을 찾았다. '문화역사 박물관'으로 탈바꿈한 성의 내부에선 다양한 전시회가 열리는데, 서쪽편 건물 3층에서 10월 1일부터 4일까지 대화가 진행됐다. 그곳에는 1869년 그려진 큰 그림이 눈길을 사로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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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석 기자
2017.02.22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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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은 루터에 의해 널리 확산된 것이 분명하지만, 동시대에 걸출한 인물인 츠빙글리가 취리히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독일 남부와 스위스 동북부 종교개혁에 큰 영향을 미쳤고 예배당 내의 성화나 성상의 제거, 간소한 예배 형식 도입, 신앙공동체를 위한 성만찬 확립 등에서 선구적 역할을 했다. 더욱이 그의 개혁안은 오늘 한국교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취리히와 츠빙글리의 삶루터가 작센 선제후라는 힘 있는 군주의 도움을 받았다면 츠빙글리는 시의회의 지원 아래 종교개혁을 펼쳤다. 그만큼 힘든 상황이었다. 루터보다 2개월 후인 1484년 1월에 태어난 츠빙글리는 바젤과 베른에서 인문주의 영향 아래 공부했으며, 22세에 사제가 됐다. 그는 1519년 취리히 대성당(그로스뮌스터교회)의 설교자가 되면서 마태복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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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석 기자
2017.02.22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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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목회자 100명이 읽은 ‘목소리 성경’크리스천미디어 연구기관인 크로스미디어랩(원장 옥성삼)은 3년간의 제작기간을 거쳐 작년 ‘목소리 성경’을 발표했다. 이 ‘목소리 성경’에는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목회자 100명이 목소리로 참여했다. 목회자 100명이 릴레이로 성경 통독을 이어간 것이다.제작에 참여한 목회자들은 교파를 초월해 목소리 성경을 위해 뭉쳤다. 우리교단 전 총회장 고 이만신 목사의 목소리를 목소리 성경에서 만나볼 수 있다. 고 이만신 목사는 에스더 1~10장을 낭독했으며, 지형은 목사(성락교회)는 시편 1~41편을, 한기채 목사(중앙교회)는 다니엘 1~12장을 읽었다.고 방지일 목사는 아가서 1장 3절, 이동원 목사(지구촌교회 원로)는 창세기 1장 1절, 이영훈 목사(여의도순복음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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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가은 기자
2017.02.08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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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말칼텐(Schmalkalten)은 개신교 제후들의 연맹체인 슈말칼텐 동맹이 만들어진 곳으로, 이 동맹은 이후 독일 땅에 종교개혁을 이룩한 실질적 힘으로 작용했다. 1531년 첫 창립때는 7개 제후와 11개의 도시가 참여했던 동맹은 6년 후에는 독일의 주요 제후들과 도시들 대부분이 참여할 정도로 강대해졌다. 이 회의에는 '루터의 신앙고백'으로 불릴만한 슈말칼텐 신앙고백이 제출되었다.시청사 내부 벽과 회의실 등엔 동맹에 참여한 나라와 도시의 문장이 걸려있었다. 60~70여명이 모일 수 있는 이곳 작은 회의실에서 동맹은 시작됐다. 시청사 옆 게오르겐교회는 회의에 참여한 제후와 신학자들이 예배한 곳이다. 병 때문에 준비실에 머물던 루터는 설교자로부터 “올라가라, 입을 열어 말하라. 그리고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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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석 기자
2016.12.21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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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텐부르크(Altenburg)는 작센 선제후들이 머물던 궁전 도시로, 루터의 동료인 게오르그 슈팔라틴이 목회한 곳이다. 루터는 1519년 교황 외교사절 칼 폰 밀티츠를 이곳에서 만나기도 했고 슈팔라틴을 만나 종교개혁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서 이곳을 14번 찾았다고 한다. 알텐부르크와 슈팔라틴알텐부르크의 종교개혁은 1522년 선제후에게 독일어 설교자를 보내달라고 요청하면서 시작되었는데, 이후 슈팔라틴이 바돌로매이교회에서 20여 년 간 목회하면서 종교개혁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슈팔라틴은 루터와 같은 나이로, 선제후의 종교담당 비서였다. 그는 루터를 바르크부르트 성으로 피신시키기도 했고 독일어 성서번역을 곁에서 돕기도 했다. 알텐부르크 성에서 열린 슈팔라틴 전시회를 찾았다. 전시실에는 중세 교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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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석 기자
2016.12.21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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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부인 카타리나 폰 보라는 대여섯 살에 수녀원에 보내졌고, 열살 때 님브센(Ninbs chen)에 있는 마리엔트론 시토회 수녀원으로 옮긴 후 수녀가 됐다. 하지만 그녀는 1523년 부활주일 전날 밤 11명의 수녀들과 함께 수녀원을 탈출해 비텐베르크에 정착했다. 그녀는 1525년 42세인 루터와 결혼했고 수도원(현 루터하우스)에서 살다가 1552년 전염병을 피하던 길에 부상을 입어 토르가우에서 죽음을 맞았다.한 청년과의 결혼이 어긋나 슬퍼하는 그녀를 루터가 구제한 것인지, 아니면 종교개혁에 몸을 바친 루터를 그녀가 구한 것인지 불분명하지만 두 사람의 결혼은 스캔들이었다. 더욱이 결혼 시점이 시끄러운 농민전쟁 때여서 루터는 세상보다 자신을 위했다는 비판을 들었다. 그러나 루터는 결혼을 통해 생활이 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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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석 기자
2016.11.23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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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스 제국의회(1521년)에 당당히 섰던 루터는 바르트부르크 성에 숨어 10개월 동안 ‘융커 요어그’라는 기사로 살면서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했다. 하지만 그가 없는 동안 비텐베르크는 급진적인 종교개혁으로 몸살을 앓았고 루터는 결국 시 지도자들의 요청으로 귀환했다. 귀환 직후 루터는 시교회에서 사순절 설교(1522년 3월 9~16일)를 통해 온건한 개혁 방향을 제시했다. 도시가 안정을 찾자 루터는 저술을 통해 종교개혁의 방향을 하나둘씩 제시했고, 인근 도시를 방문해 설교를 통해 종교개혁을 확산시켰다. 루터는 각 지방 시찰관을 통해 교회의 실태를 파악했는데, 이를 통해 1530년대 독일 중부인 작센과 튀링겐, 헤센을 중심으로 독일의 종교개혁을 든든히 세웠다.온건한 개혁 공고히 한 ‘바이마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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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석 기자
2016.11.23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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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루터는 공의회에서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싶었다. 교황보다 공의회에 더 권위를 둔 것이다. 하지만 공의회는 열리지 않았고 루터는 1521년 보름스 제국의회에 서게 된다. 황제로 선출된 카를 5세는 첫 제국의회를 열면서 루터 문제를 정리하려고 시도한다. 독일 제후들로부터 군대와 재정을 지원받으려는 황제는 우호적 태도로 루터의 안전을 보장했고, 루터 또한 비굴하게 숨는 것보다 죽더라도 자신의 입장을 밝히겠다면서 보름스로 향했다.보름스에서 처음 찾은 곳은 루터의 종교개혁 기념상(Lutherdenkmal)이다. 1868년 세워진 기념상은 루터를 포함하여 종교개혁 인물 9명과 역사를 담은 기념상, 부조, 인물과 도시국가의 문장 등이 담겨 있다. 자신의 신념을 대내외에 선포하고 그의 신념이 독일 전역으로 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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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석 기자
2016.10.26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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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신학’을 발표한 하이델베르크교황청의 첫 반응은 루터가 속한 아우구스티너 수도회를 통한 문제해결이다. 루터는 1518년 4월 하이델베르크에서 열린 수도회 총회에 참석, 자신의 입장을 설명한다. 루터는 이 총회에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해 ‘하이델베르크 논제’를 발표했다. 40여 개의 신학적, 철학적 논제를 통해 루터는 중세 교회의 신학을 ‘영광의 신학’으로 규정하고, 그것에 반대해 ‘십자가 신학’을 강조한다. 수도회원들은 루터를 지지했고 종교개혁의 횃불이 타오를 때 속속 종교개혁 대열에 동참했다.하이델베르크에서 루터의 흔적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강의한 장소나 참석자 등의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루터가 성서학 교수란 점, 내용이 학문적인 내용이란 점에서 하이델베르크 대학 강의실이 유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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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석 기자
2016.10.26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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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낙원은 서울 등 수도권에 가깝고 교통입지가 좋다는 것이 장점이다. 영동과 중부고속도로가 교차하는 지점이라 어디서나 접근성이 좋다. 영동고속도로 덕평 IC에서 에덴낙원까지는 약 6km 거리이며, 중부고속도로 서이천 IC에서는 약 3km로 5분이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다. 이번 달 개통되는 경강선을 이용하는 경우 신둔역이나 이천역에서 내리면 차로 약 15분이면 도착한다. 교통정체로 이동이 어려운 명절 같은 때에도 부담이 적고, 평소에도 오고 가며 언제든지 들릴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있다. 에덴낙원 주변에는 기독교순교자기념관, 총신대 신학대원 등이 있고, 이천의 명소 이천 롯데프리미엄 아울렛에서 5분 내외 거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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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승영 기자
2016.10.12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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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낙원은 장지나 묘지를 마련하지 못해 고민하는 교회에게는 희소식이 될 수 있다. 어느 한 교회가 소유,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공유 개념으로 한국교회 전체에 개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덴낙원은 어느 교회든지 회원으로 가입하면 해당 교회의 장지로 부르며 이용할 수 있다. 실제로 다양한 교단의 여러 교회들이 이미 회원으로 가입해 부활소망가든을 교회 장지로 이용하고 있다. 납골당과 묘지를 구하기 힘든 요즘 장지에 대한 걱정을 단숨에 해결 할 수 있어 관심을 받고 있다. 회원 가입도 쉽고 절차도 비교적 간단하다. 가입 신청서와 함께 교단 소속 증명서와 주보만 첨부하면 교단연합으로 구성된 운영이사회의 결의에 따라 회원교회로 인정되며 별도의 교회예산 부담 없이 에덴낙원을 이용할 수 있다. 일
기획
황승영 기자
2016.10.12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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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추모의 공간으로만 여겨졌던 묘지가 달라지고 있다. 과거에는 엄숙하고 무겁기만 했던 공간이었지만 이제는 특별한 날이 아니어도 가족들이 언제라도 부담 없이 찾아갈 수 있는 곳으로 바뀌고 있다. 경기도 이천시 마장면 서이천로 도드림산 자락에 있는 ‘에덴낙원 메모리얼 리조트’가 바로 그런 곳이다. ‘죽음’이 단순히 끝이 아니라 천국으로 가는 새로운 시작이라는 믿음 위에 세워진 에덴낙원은 아름다운 자연 경관과 어우러져 사랑하는 이를 아름답고 품위 있게 추모할 수 있는 공간, 부활의 소망을 함께 나누며 오래도록 머물고 싶은 영혼의 안식처로 조성됐다. 한국의 기독교 장묘문화를 바꾸기 위해 재단법인 에덴낙원선교회(이사장 곽요셉 목사)가 설립한 에덴낙원은 우선 지금까지의 추모관과는 그 풍경이 사뭇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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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승영 기자
2016.10.12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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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포세대에 이은 5포세대. 낮은 임금과 높은 물가, 불안정한 고용으로 연애와 결혼, 출산, 그리고 인간관계와 주택구매를 포기한 젊은 세대를 이르는 말이다. 이들은 이른 나이에 포기의 쓸쓸함을 이미 경험하고 있다. 이런 시대 속에서 우리 성결교회 청년들은 어떻게 살아내고 있을까? 다양한 자리에서 치열하게 살고 있는 청년들을 만나 그들의 솔직한 목소리를 담아봤다.흔들리는 것마저 아름다운 청춘 / 고봉주(27세·홍은교회)고봉주 청년의 꿈은 연극배우이다. 대학에 입학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연극만 바라보면서 달려왔다. 졸업 후 지금까지 5편의 연극과 장, 단편 독립 영화에 출연했다. 그런데 현실은 막막하다. 졸업한지 1년이 지났는데 아직 이렇다 할 기반이 잡히지 않았다. 연극계의 현실도 팍팍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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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가은 기자
2016.10.12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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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확산의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구텐베르크에 의해 개발된 인쇄기술이다. 구텐베르크는 1456년 고향 마인츠에 금속활자를 놓고 잉크를 바른 후 종이를 대고 압착하는 방식의 인쇄기를 만들었고, 라틴어 성서와 교회 예배서, 학교의 교과서와 사전 등을 인쇄했다. 그의 인쇄술은 수천 장의 인쇄물을 쉽고 빠르게 만들기 때문에 유럽 전역으로 퍼졌고, 종교개혁시기에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가의 저술을 확산시켰다.구텐베르크를 만나기 위해 마인츠 '구텐베르크 박물관'을 찾았다. 4층으로 된 새 건물에는 그의 삶과 인쇄물, 인쇄 도구, 돌과 동판을 이용한 그림 인쇄, 책 제본 등 인쇄에 대한 모든 것이 전시되어 있었다. 지하에는 그의 인쇄법을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하루 4~5번 진행됐고, 2층에는 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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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석 기자
2016.08.31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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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사 루터는 1511년 에르푸르트를 떠나 비텐베르크에 정착했다. 몇 해 전(1508년)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윤리철학을 강의한 루터는 로마를 다녀온 후 비텐베르크의 수도원 부원장과 대학의 교수로, 그리고 시교회의 설교자로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루터의 도시, 비텐베르크옛 기차역에 내려 제일 먼저 비텐베르크 시청 앞 광장으로 갔다. 광장 한 쪽 종교개혁 500주년을 알리는 붉은 색 지구본 위로 500주년 마크와 글씨, 루터의 얼굴이 선명했다. 광장에는 루터와 동료 멜란히톤의 기념상이 좌우에 자리했다. 1821년 건립된 루터 기념상은 설교자 가운을 입은 중년의 루터를 형상화했는데 성서를 펼쳐든 모습에 눈길이 간다. 말씀에 사로잡혔고 성서를 깨달아 가르치는데 최선을 다한 그를 정확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옛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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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석 기자
2016.08.31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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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나그네이고, 그 길은 나그네 길이다. 실락원에서 복락원을 찾아가는 천로역정의 길은 장거리 길이고 고생길이다. 애굽에 내려간 야곱이 바로 왕과 주고받은 말은 인생이 나그네 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바로가 묻되 네 연세가 얼마뇨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 47:8,9)나그네 길의 문제는 내일을 알지 못하고, 또 길을 알지 못하고 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도자가 필요하다. 나는 인도자 되시는 주님을 고등학교 3학년 때에 처음으로 만났다. 그 때부터 오늘까지 나의 인도자는 나를 이끌어 주셨다. 나의 뜻이나 계획과는 다르지만 언제나 합력하여 선을 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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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태 박사(서울신대 전 총장)
2016.05.26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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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에 대한 해석은 다음 세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인간의 본질을 강조하는 본성적 해석이다. 여기에는 인간의 내적 본성인 정신적 능력이나 지식, 의로움, 거룩함 등이 포함된다. 인간은 “하나님을 따라서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음을 받은 새 사람”(엡 4:24)이다. 둘째 하나님과의 교류를 강조하는 관계적 해석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말씀을 듣는 상대이면서 또한 하나님께 응답할 수 있는 책임적 인격체로 존재한다. 인간은 하나님과 동행해야 하는 동반자 관계이다. 셋째 인간의 사명과 역할을 강조하는 기능적 해석이다. 고대시대 왕은 자신의 통치지역에 지방장관을 임명하면서 자신의 형상을 함께 보냈다. 그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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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승 교수(서울신대)
2016.05.26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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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 실버 청춘이 달린다.고령화 사회에 진입하면서 건강한 노인상의 기준도 점차 바뀌고 있다. ‘이 나이에 내가 어떻게…’ 하는 식의 고정 관념을 떨쳐버리고 과감한 도전 의식과 뜨거운 열정으로 젊은이들 못 지 않게 하나님 나라를 위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크리스천 시니어들이 늘고 있다. 하나님의 일에 은퇴란 없기 때문이다. 이런 노인들에게 나이는 숫자일 뿐이다. 신앙심을 바탕으로 젊은이 못지않게 자신의 꿈을 활발히 펼치는 ‘크리스천 실버 청춘’을 소개한다.꼿꼿한 허리,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고운 매무새. 정경희 권사(역촌교회·사진)는 최근에 심근경색을 앓았던 88세 노(老)권사라고 하기엔 너무도 활기찬 모습이었다.“그래도 오늘 찬양하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어요. 살려
기획
김가은 기자
2016.05.03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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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 실버 청춘이 달린다.고령화 사회에 진입하면서 건강한 노인상의 기준도 점차 바뀌고 있다. ‘이 나이에 내가 어떻게…’ 하는 식의 고정 관념을 떨쳐버리고 과감한 도전 의식과 뜨거운 열정으로 젊은이들 못 지 않게 하나님 나라를 위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크리스천 시니어들이 늘고 있다. 하나님의 일에 은퇴란 없기 때문이다. 이런 노인들에게 나이는 숫자일 뿐이다. 신앙심을 바탕으로 젊은이 못지않게 자신의 꿈을 활발히 펼치는 ‘크리스천 실버 청춘’을 소개한다. 세현교회 이창열 명예장로(76세)와 이수자 명예 권사(75세) 부부는 일흔이 훌쩍 넘은 나이에 선교사역을 시작했다. 연금을 받으며 여생을 편히 누릴 수 있지만 젊은이들도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해외선교사로 인생 2막을 시작한 것이다
기획
황승영 기자
2016.05.03 14: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