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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생원을 나와 다시 해양대학로에서 신인비치호텔을 지나 15분 정도 걸으면 도로 왼쪽에 맛집 ‘선경준치전문점’이 나온다. 맛집을 끼고 좁은 골목길 해안로 57길을 따라 걸어 들어간다. 골목길 오른쪽은 담장이 높다. 조선내화 공장이다. 1938년 일제는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경제수탈의 일환으로 조선내화를 설립한다. 해남 성산광산에서 원료 납석을 들여오고 생산한 완제품 내화벽돌을 실어 나르기 쉽도록 유달산 남쪽 기슭 선창가에 지었다. 1947년 당시 목포재벌 손용기가 적산으로 불하받아 조선내화를 재창립한다. 1953년 한국전쟁으로 파괴된 조선내화를 성옥 이훈동 회장이 인수한다. 1964년 시멘트산업이 급성장하기 시작하고 1973년에는 포항제철을 준공하면서 내화물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대한민국 산업화
기획
최석호 교수
2019.03.13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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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4월 18일 목포에 도착한 선교사 레이놀즈와 드루는 다순구미 선창가 노방전도 중 한양에서 언더우드 목사의 설교를 듣고 신앙생활을 시작했다는 사람을 만난다. 고종 황제가 목포를 곧 개항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선교사 레이놀즈와 유진 벨은 1896년 2월 목포를 다시 찾는다. 목포 선교의 거점이 될 양동 언덕배기 땅을 매입한다. 1897년 10월 1일 고종은 목포를 개항한다. 156호 600여 명밖에 되지 않는 작은 마을 바다와 갯벌 위에 자주적 개항장 목포가 탄생한다. 1898년 유진 벨 선교사는 양동교회를, 함께 들어 온 의료선교사 오웬은 프렌치병원을, 1899년 목포로 들어온 교육선교사 스트래퍼는 정명여학교와 영흥학교를 개교함으로써 목포선교부를 완성한다. 그러나 일제는 1900년 목포에
기획
최석호 교수
2019.03.13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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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제3기 신도시가 발표되면서 신도시에서의 교회개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새로운 인구의 유입과 발전가능성이 높아 신도시를 찾아가는 목회자가 늘고 있다. 그러나 높은 분양가와 지지부진한 성장 등 높은 현실의 벽 앞에 문을 닫고 떠나는 목회자도 있다. 신도시 공략을 위해 신도시의 성결교회의 상황을 살피고, 전략적 개척과 거점 확보를 위한 방안을 모색한다. 발전 가능성 많지만 현실 벽도 높아김포한강신도시는 2012년 경기도 김포시의 장기지구, 운양지구, 구래지구, 양곡지구, 마산지구 등으로 구성되어 부지면적 3,585,567.
기획
박종언 기자
2019.01.30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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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관광공사가 펴낸 ‘인천 순례길 가이드북:인천 순례길을 걷다’에서는 인천 곳곳에 있는 기독교와 천주교 순례지를 만나볼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 교회인 내리교회를 비롯해 아펜젤러 선교사의 사택인 성서침례교회,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탑, 국제복음방송국(전 극동방송 터), 인천 지역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이었던 영화학당, 한국선교역사기념관 등 인천 중구와 동구 18곳, 남구와 남동구 6곳, 강화도 11곳, 백령도와 소청도 등 섬 지역 4곳, 총 40곳의 순례지를 담아냈다.
기획
김정례 기자
2019.01.09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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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동성당 빨강벽돌 담장길 송학로를 따라 3분을 걸으면 ‘홍예문’ 위를 지나고, 다시 3분이면 ‘자유공원’에 닿는다. 맥아더동상 아래 광장에 서면 인천항과 월미도 그리고 인천공항으로 이어지는 인천대교를 한 눈에 조망한다. 특히 해넘이가 멋지다.자유공원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을 지나 왼쪽 계단으로 내려간다. 계단 아래 선린문(善隣門)을 지나 계속 이어지는 계단을 끝까지 내려가면 청국조계(淸國租界) 차이나타운이다. 계단 끝에서 왼쪽 길로 꺾으면 ‘공화춘’. 공화춘에서 오른쪽으로 내려가다가 북성동행정복지센터를 끼고 왼쪽 골목길 차이나타운44번길로 들어서면 끄트머리에 ‘짜장면박물관’이 나온다. 한국식 짜장면을 처음 만든 중국집 ‘공화춘’ 옛 건물이다. 공화춘 건물을 그대로 살려서 짜장면박물관을 만들었다.
기획
최석호 교수
2019.01.09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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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은 사람들의 삶의 숨결이 묻어나는 삶의 현장이자, 그 지역의 삶과 역사를 들려주는 보고(寶庫)이다. 인천 개항장 길은 청일전쟁과 노일전쟁, 인천상륙작전 등 근대의 역사가 소용돌이쳤던 곳이기도 하고, 기독교의 역사가 첫 발을 들여 놓은 특별한 골목길이기도 하다. 초기 선교사들이 복음의 씨앗을 심어서 한국교회의 초석을 놓은 길이다. 골목길 구석구석에 선교사들이 뿌려 놓은 기독교 정신이 배여 있고, 지금도 그 숭고한 역사가 살아 숨 쉬고 있다. 우리나라 첫 감리교회인 내리교회, 웨슬리 채플, 근대식 교육기관 영화학당, 성공회 내동교회 등이 있는 산책로들이다. 복음의 황무지에 뿌려진 땀과 눈물을 기억하며 그 길을 함께 걸어보자. 인천개항장 평화길인천도호부 북서쪽 약 8킬로
기획
최석호 교수
2019.01.09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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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3주년을 맞은 우리나라가 지금처럼 발전하고 안정적인 기틀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해방 후 한국교회의 역할이 컸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해방 후 한국교회는 무너진 나라를 재건하는데 커다란 영향력을 끼쳤다. 국가를 대신해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설립하고, 미국에서 구호물자를 받아 국민들의 복지를 담당했다. 해방 이후 기독교는 단지 종교단체가 아니라 정부가 해야할 일을 대신하며 유사 정부의 기능을 담당한 것이다.허명섭 목사(시흥제일교회)는 “미군정 행정고문 11명 중 6명, 군정 초대 한국인 국장 13명 중 7명, 입법의원 90명 중 21명과 초대 제헌의원 190명 중 38명이 기독교 신자였다”며 “당시 남한 기독교인의 숫자는 전 국민의 0.52%로 약 10만여 명에 불과했음을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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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언 기자
2018.08.14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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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계양구 부평제일교회(김종웅 목사)는 봉오대로 거리공원과 나란히 길게 자리 잡고 있다. 이름처럼 1928년 부평동에 세워졌지만 효성동으로 자리를 옮긴 건 지난 2010년이다. 긴 교회 터만큼이나 ‘품’도 넓다. 이웃하고 있는 세 개 학교를 품으면서도 사랑의 손길을 지역 사회 구석구석까지 뻗치고 있다. 부평도심에서 낙후된 이곳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새로운 사명을 짊어진 것이다. 김종웅 목사는 “효성동은 인천에서도 가장 낙후된 지역이다. 이들을 위해 교회가 섬김의 역할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부평제일교회는 대문도, 문턱도 없다. 언제나 지역사회에 활짝 열려 있다. 쉴 곳 하나 변변하게 없던 효성동에 이웃주민들이 누구나 와서 편히 쉴 수 있는 카페와 문화센터도 개설했다. 어려운 이웃
기획
황승영 기자
2018.03.14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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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90주년을 맞은 부평제일교회는 지역과 열방을 품는 기념비적인 30대 기념사업을 추진한다. 이른바 독수리 프로젝트(Eagle Project)다. 은혜의 90년을 감사하고 영광의 100년을 향해 독수리처럼 더 큰 꿈과 이상을 향해 비상하겠다는 것이다. 김종웅 목사는 “우리 교회의 모습은 푸른창공을 비상하는 독수리형상으로 건축됐다”면서 “이제 90주년 동안 지켜주신 하나님 은혜에 감사하며 영광의 100년을 향해 달려가고자 한다”고 밝혔다. 사명을 향해 달려간다90주년 기념행사는 3월 18일 기념주일 및 임직식으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은혜의 90년(과거)과 영광의 100년(미래)’을 이어줄 신임 장로와 권사 등 64명의 자랑스러운 일꾼을 세우는 임직식은 90주년 사업의 핵심이다. 새 사명을 붙잡
기획
황승영 기자
2018.03.14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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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90주년을 맞이한 부평제일교회는 ‘선교하는 교회’를 꿈꾸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멈추지 않고 달리고 있다. 그동안 부평제일교회를 통해 국내 많은 작은교회들이 자립할 힘을 얻고, 파푸아뉴기니, 가봉, 차드, 카메룬 등 머나먼 아프리카 땅에도 교회와 학교, 선교센터가 세워졌다. 교회창립 때부터 90주년을 맞이한 오늘까지 선교를 향한 열정과 열심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부평제일교회의 선교는 1956년 첫 지교회로 부평신촌교회를 개척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때부터 1년에 1개 교회씩 소사제일교회, 효성교회, 백마교회, 남부교회, 당미교회, 장기리교회, 승천교회, 등 8개 교회를 매년 잇달아 개척하는 기록을 세웠다. 1991년엔 14번째 지교회로 미주성산교회를 개척하며 해외로 선교 영역을 확대
기획
문혜성 기자
2018.03.14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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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만 제대로 믿으면 변화될 수 있어요. 그런데 그렇지 못해서 사단에게 묶여 있어요. 저는 그게 너무 안타까워요”‘여성목사’라는 편견을 넘어 전 세계에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이순희 목사. 이 목사는 서울신대와 서울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영혼의 샘 세계선교센터 회장, 찬양치유 부흥사로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사역하고 있다. 이 목사의 이런 행보는 자신이 만난 하나님을 더 많은 이에게 알리고자 하는 절실함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이 목사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화려한 삶을 살았지만 결혼 후 원인을 알 수 없는 환청과 환영에 시달려 고통을 겪던 중 남편의 권유로 교회에 나가 예수를 영접하게 된 뒤 극적인 변화를 체험했다. 이후 자신의 삶을 드리고, 1997년부터 복음가수로 사역을 시작했다. 복음가수로
기획
박종언 기자
2018.03.14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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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지방 백송교회(이순희 목사) 집회에는 특별한 것이 있다. 찬양과 기도, 말씀 선포 등은 다른 집회와 비슷하지만 내적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불같이 일어난다는 점이 남다르다.지난 3월 8일 백송교회 보령수양관 부흥성회에서 만난 이태세 목사의 얼굴은 밝았다. 불과 얼마전까지 기억상실증에 걸려 고통받았다는 그의 모습은 모든 아픔을 극복하고 회복한 모습이었다. 이 목사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중형교회의 담임목사였다. 그러던 어느 날 목회에 문제가 생겨 40일 금식기도를 했고 후유증으로 기억상실증에 걸렸다. 병으로 설교도, 심방도 할수 없었던 그는 결국 목회현장을 떠나게 되었다. 이후 이 목사는 자존감 하락과 우울증에 시달렸고 가족까지 고통을 받는 상황이 되었다.그랬던 이 목사가 영적으로 회복한 것은
기획
박종언 기자
2018.03.14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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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교회는 2009년 성결교회로는 최초로 성도 1만 명 시대를 열었다. 1982년 일곱 명의 집사가 교회를 개척한지 28년 만에 놀라운 부흥을 일궈낸 것이다. 수도권이나 광역시가 아닌 전통적인 지방도시에서 단시간에 이룩한 성장이라 ‘기적적인 부흥’이라는 수식어가 뒤따르고 있다. 교단 내 최대 선교사 파송 ‘세계는 우리 바울교회 교구입니다’라는 표어로 선교를 실천하고 있는 바울교회는 교단 내 최대 선교사 파송 교회다. 2012년 교단에서 처음으로 선교사 100가정 파송 시대를 열었다. 35년간 누적 파송 선교사는 253명에 달한다. 300 선교사 파송에 근접하고 있다.교단 내 최대 면적지하 8평에서 시작된 바울교회는 단일 교회로는 가장 큰 면적의 건평을 자랑한다. 1999년 건축한 교회당은 건물 전용
기획
황승영 기자
2017.11.29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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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세대를 잘 양육하고 최고의 예배를 드리게 하시고, 지역마다 복음의 능력이 일어나 5만 명의 교회가 되게 하소서."바울교회 새 담임으로 취임한 신용수 목사의 36가지 기도제목 중 하나다. 신 목사는 바울교회에 부임하면서 36가지 기도제목을 늘 몸에 품고 다닌다. 앉으나 서나 바울교회와 그 성도, 목회를 위해 기도하기 위해서다. 사실, 신 목사는 교단 내에서 기도를 많이 하는 목회자로 알려졌다. 하루 2시간 이상 기도는 기본이고, 하나님께 더 쓰임 받는 목회자가 되게 해달라고 40일 금식기도도 드렸다. 고등학교와 대학교, 대학원을 모두 수석 졸업한 그는 인격과 영성, 지성을 두루 갖춘 목회자로 평가받고 있다. 목회자 사이에서는 의리가 있고, 부드러운 리더십의 소유자로 통한다. 이런 신 목사는 용
기획
황승영 기자
2017.11.29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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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교회의 해외선교가 가장 왕성히 벌어지고 있는 곳은 필리핀이다. 교회개척과 현지인 양성, 기도원사역 등 선교의 3박자가 고르게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필리핀에는 바울교회와 국내지교회가 협력해 세운 현지인 교회가 15곳이나 된다. 또 해외 선교지 중 유일하게 현지인 목회자 양성을 위한 정규 신학대학인 바울대학과 겟네마네 바울기도원도 운영하고 있다. 1992년 이종우 선교사를 필리핀에 파송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선교에 나선 바울교회는 1996년 리잘 몬타르반 지역에 기도원을 세웠다. 수도 마닐라로 부터 2시간 30~40분을 달리다 보면 산중턱에 있는 기도원을 만날 수 있다. 밀림 한 가운데 우뚝 선 기도원은 보기만 해도 은혜가 된다. 대개 선교지에 교회나 학교, 병원을 세우는 것이 기존 선교방식이었지
기획
황승영 기자
2017.11.29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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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황승영 기자
2017.11.29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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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교회는 선교사를 파송하고, 전 세계에 선교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개척 초기에 선교하는 교회가 되겠다고 선포한 사람은 바울교회(당시 동전주교회)에 갓 부임한 원팔연 목사(당시 37세)였다. 맘껏 선교하기 위해 잘 나가던 정읍교회를 사임하고 1985년 2월 개척교회나 다름없었던 교회에 부임, 첫 설교에서 선교비전을 선포했다. 하지만 20여 명의 성도들은 “우리 교회 형편에서 선교는 불가능 합니다”라고 코웃음 쳤다. 8평 지하 예배실에서 일곱 집사가 시작한 개척 초기, 교회 재정이 넉넉할 리 만무했다.개척 초기부터 선교하는 교회로 출발원 목사는 그날부터 “내 말에 책임을 지게 해 달라”며 담요 한 장을 들고 매일 강대상에서 철야기도로 하나님께 매달렸다. 그리고 한시도 선교를 잊지 말자는 뜻에서
기획
황승영 기자
2017.11.29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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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교회는 미래가 더 밝은 교회다. 전체 교인 연령별 현황을 보면, 20~30대가 거의 40%나 된다. 40대는 18%, 50대가 16%로 그 뒤를 잇고 있다. 고령화 시대에 교회가 점점 노령화 되는 흐름을 역행해 젊어지고 있는 것이다. 교회학교 수도 전체 교인의 10% 이상 차지하고 있으며, 초등부가 든든한 것이 특징이다. 남녀 비율도 여성이 58%로 다소 비율이 높지만 남성 42%로 다른 교회에 비하면 남성이 상대적으로 많다. 여기에 바울교회의 저력이 있다. 2007년부터 새신자가 매년 1,000명 이상 등록하고 등록교인이 2016년 기준으로 누적 성도가 2만 명을 넘어섰다. 현재 출석 성도도 1만1,000명 선을 유지하고 있다.
기획
황승영 기자
2017.11.29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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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년 목회 여정을 마친 원팔연 목사는 전주 다가동 일곱 집사가 시작한 바울교회를 호남 최대 교회로 만들었다. 교단에서 처음으로 1만 성도를 일궜다. 그는 한사코 부인하지만 바울교회의 성장 비결은 원 목사의 충실한 사역과 목회적 열정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 평가다. 외부 부흥회를 나가도 반드시 금요철야 기도회만큼은 직접 인도했으며, 새벽 1~2시에 귀가해도 새벽기도회를 쉬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고 주변 성도들은 말한다. 성도들이 심방을 원하면 밤이나 새벽이나 가릴 것이 달려갔다. 이런 성실함과 열정이 성도들에게 신뢰를 주었고, 지금의 바울교회를 이루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남들과 다른 길을 걸었다. 불교가정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사월 초파일에 출생했다고 해서 불교의 상징인
기획
황승영 기자
2017.11.29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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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95개조 반박문으로 종교개혁이 시작됐다면, 칼뱅은 유럽 전역으로 종교개혁을 확산시킨 인물이다. 특히 '개혁(파)교회'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칼뱅의 종교개혁 정신은 네덜란드 개혁교회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영국 청교도와 미국 장로교회를 거쳐 한국으로 전해져 오늘 한국교회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어린 시절 신앙의 토대 누아용칼뱅은 1509년 프랑스 북부의 도시인 누아용에서 태어났다. 칼뱅의 아버지는 대성당 참사회의 간부였고, 어머니는 어린 아들과 함께 수도원을 자주 방문할 정도로 경건한 인물이었다. 아마도 칼뱅은 주교 자녀들과 함께 대성당 안팎을 놀이터 삼아 뛰어 놀았을 것이다. 라틴어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그는 성가대원으로도 일했고 1521년 성직록에 이름을 올린 후 예배 돕는 일도 하게
기획
조재석 기자
2017.11.08 15: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