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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해방 후, 그는 군청근무를 그만두고 쉬고 있는데 고향 친구로 장로교에 다니는 임영재가 찾아와서 함께 신학교에 가자고 권면하기에 이것도 하나님의 뜻인가 보다 생각하고 백승하에게도 권면하여 함께 1945년 11월에 서울신학교에 입학했다. 1943년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가 된 것을 해방을 맞은 그해 말에 재건한 신학교여서 사명자들이 많이 모였다.이건 교장, 박현명, 김유연, 한성과, 최석모 목사 등이 교수진이었고, 후에 총회장을 지낸 정진경 목사와 정승일 목사, 합동측 장로교 총회장을 지낸 박명수 목사, 감리교 감독을 지낸 최기석 목사, 이준용 감독, 미국 동양선교교회 임동선 목사 등과 함께 공부했다.그는 1949년 6월에 신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첫 목회지인 충남 서천 길산교회에 부임했다.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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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결신문
2020.07.02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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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규 목사는 일제강점기인 1923년 음력 12월 24일, 충남 부여군 장암면 석동리 288번지에서 전형적인 유교가정의 부 최영의와 모 박정심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초등학교를 나와 독학으로 부여군청에 근무할 정도로 영민했고, 20세 되던 1942년 4월 22일, 홍산교회에 신앙 좋기로 소문난 전 모 집사의 딸 김덕례 양과 결혼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홍역후유증으로 기관지천식을 앓고 있는데 교회에 가면 병도 낫고, 예수 믿으면 천당도 가고 좋다는 유진항 친구(후에 목사 됨)의 전도를 받아 16세부터 마을에 있는 석동교회에 나갔다. 자기도 모르게 병이 나아, 한 2년 동안 꾸준히 나갔다. 1941년 겨울, 오영필 목사님을 모시고 부흥회가 있었는데 은혜를 받아 철저히 회개하고 중생을 체험했다.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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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수 목사
2020.06.17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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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토마스 목사의 사건을 알게 된 서울주재 영국총영사 로이드는 일본에 있는 영국대사관에 보고했다. 영국은 이것을 계기로 일본인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반 선교사 감정에 경고를 주고 한국에 있는 영국인을 보호하는 계기로 삼고자했다. 그래서 총독부 정무총감 야마기타에게 강력히 항의했다. 또한 일본주재 영국대사 그린(Greene)은 일본외무부 차관 시데하라를 만나서 이 사건의 조속한 해결을 요구했다. 이에 일본외교부는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에게 전보를 보내 이것이 또 하나의 크로포드 양 케이스(Miss Crawford Case)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것을 지시했다. 크로포드 케이스란 1918년 만주 장춘에서 사역하던 아일랜드 선교사 크로포드를 일본 군인이 구타한 사건을 가리키는데 결국 일본은 외무성을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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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전 본지 주필 )
2020.06.10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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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1일에 일어난 조선독립운동은 조선의 기독교가 앞장섰었다. 일본경찰과 헌병들은 조선의 기독교지도자들을 더욱 감시하고 탄압했으며, 외국선교사들에게 대하여는 한 층 더 엄한 감시와 탄압을 서슴지 않았다. 토마스 선교사 역시 다른 외국선교사와 다름이 없기 때문에 역시 일본관헌들에게 감시를 받았다. 토마스 감독은 3·1운동 직후여서 어려움이 있었지만 여름휴가 때를 이용하여 예년과 다름없이 지방순회를 했다.동양선교회는 1919년 3·1운동이 있은 뒤에 강경에 전도관을 신축하기로 했고, 당시의 포교규칙에 의해 조선총독부로부터 설립허가를 받았다. 토마스 감독은 새로 구입한 강경의 전도관을 시찰하기 위해 3월 17일 경찰서에 가서 여행신고를 하고 3월 19일 강경에 간다는 전보를 보낸 다음 3월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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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본지 전 주필)
2020.06.03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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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성서학원 신축은 1920년 여름에 공사를 시작해서 1921년 3월에 완공했다. 공사를 맡은 사람은 중국의 기독교인 사업가였다. 신축건물은 남학생들이 사용하고 기존건물은 여학생들이 사용하게 되었다. 이 건물은 명동의 천주교성당이나 종로의 한성기독청년회관(YMCA)보다는 작았지만 서울에서 으뜸가는 양식건축물로서 장안의 명물이었다. 일반인에게는 5층 예배당으로 불린 이 건물은 성결교회의 유일한 신학교로 사용되었다. 카우만 총리가 이러한 건물을 꿈꾼 것은 동양선교회 설립목적대로 먼저 한국, 일본, 중국의 선교에 대한 비전이 있었고, 한국이 동양선교의 중심지가 될 것을 예견하고 구상했던 것이다. 실상 성서학원의 건물은 구상했던 것보다 3분의 1이 작아졌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경제 불황이 극심하여 부득이 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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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전 본지 주필)
2020.05.28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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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학원의 건물이 완성되면서 학교가 보다 체계적으로 발전했다. 학생 선발은 원래 지원하는 대로 받아들였으나 책임있는 사람이 추천하는 사람만 허가했다. 또한 입학 후 2개월 동안은 학생들의 소명을 확인하는 시험기간으로 정하고 모든 경비는 자비로 부담하도록 했다. 토마스는 학생들이 전도자의 길을 일종의 쉬운 직업으로 생각해서 지원하는 경우가 없는가를 주의 깊게 살폈다. 이 기간에 소명감이 확인된 학생은 정식으로 입학하게 되었고 동양선교회가 학생들의 경비를 지불했다. 수업연한은 3년 과정으로 정했다. 3년 동안 사역을 위한 성서지식을 얻는 동시에 개인적으로 온전한 구원을 체험해야 한다. 성경전체를 다 배운다. 성경공부는 종합적인 방법을 통해 성경을 체계적이고 전체적으로 보고 중요한 핵심을 파악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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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본지 전 주필)
2020.05.13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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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선교회는 한국에 신학교를 세우는데 최대의 관심을 기울였다. 동양선교회의 기관지인「전보」(Electric Messages) 1909년 10월호에 의하면 한국선교는 선교사보다 토착민을 훈련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아직 한국에는 성결계통의 성서학원은 없고 기존교파가 토착사역자를 양성하는 기관을 가지고 있지만 일 년 내내 쉼 없이 성서학원을 운영하는 곳은 없다고 지적하면서 한국에 성서학원설립의 당위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다. 동양선교회는 한국에 성서학원이 세워지게 되면 일본의 도쿄성서학원보다 더 커지게 될 것이며 학생들은 약 100명을 수용하게 될 것이고 그 비용은 약 1만 달러가 소요될 것이라고도 했다. 토마스 목사는 한국에 부임한지 4년만인 1911년 3월 13일에 무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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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전 본지 주필)
2020.04.28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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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성결교회의 명칭은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이었다. 그 다음은 ‘조선야소교동양선교회 성결교회’였다. 성결교회의 명칭에서 동양선교회가 삭제된 것은 해방 이후다.동양선교회는 한국에서 한국의 사역을 총괄하고 성서학원을 운영할 만한 선교사를 찾았다. 그가 1910년 한국에 온 존 토마스 선교사(Thomas, Rev. John-土瑪洙)였다. 존 토마스는 1867년 12월 17일 영국 웨일즈에서 태어나 동네에 있는 브니엘 교회에 다녔다. 그 후 런던으로 가서 형 데이비드와 동업하여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성공했다. 그러던 중 배터시(Battersea)에 있는 스펙홀(Speak Hall)의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스펙홀은 영국의 유명한 성결운동지도자 해리스(Reader Harris)가 운영하던 선교단체로서 많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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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전 본지 주필)
2020.04.14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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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 박사의 활동은 학장이 된 후, 교단 내에서 보다 초교파적인 교계의 활동이 더욱 눈부셨다. 평소 그가 지닌 보수적인 신앙과 경건한 삶, 그리고 학자의 깊은 연구를 통해 얻은 해박한 지식 등이 학장이라는 공적 직무를 발판으로 날개를 단 것이다.그는 교단적으로 서울신대를 대표한 학장이기에, 교단 총회의 신학교육정책위원회의 당연직 멤버였다. 그래서 총회 산하 유일한 신학대학 대표자로서 서울신대를 옹호하고 서울신대의 발전을 위한 창의적 아이디어를 제공하여 전국교회가 신학대학을 돕게 하는데 힘썼다. 1979년 당시 총회 산하 교역자양성원을 전국에 3곳(충청, 호남, 영남)에 설립한다는 각 지방회의 건의를 총회가 수락했다. 그래서 3개 지역에서 준비가 완료되면 신학정책위원회가 답사한 후, 총회에 건의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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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전 본지 편집위원장)
2020.04.08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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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미국 에스베리 신학대학에 유학을 가서, 전공을 신약신학으로 택했다. 그는 신약 중 공관복음서와는 다른 독창적인 요한복음서에 큰 은혜를 받았기에 더욱 깊이 연구하고 싶은 이유였다. 그래서 별로 공부한 적이 없는 헬라어를 배우는데 그의 어학적 재능이 발휘되었으며, 모든 과목도 거의 A학점을 받아 2년 만에 M.Div 학위를 받고 귀국한 것이 1964년이었다.그는 귀국과 동시에 서울신학대학 전임강사로 승진함과 함께 거의 30년 간 이 학교에서 교수생활을 했다. 그의 첫 강의 때부터 학생들은 그에게 매료되었다. 당시 신입생이던 최종진 목사는 그에 대한 첫인상을 “우리들의 선생님!”이란 글에서 그의 몇 가지 특징을 짚었다.그것은 젠틀한 외모, 영어에 능통한 지성적 언어유희, 다른 교수와 달리 손바닥만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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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전 본지 편집위원장 )
2020.04.01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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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은 1950년 4월 서울신학교에 최우수 성적으로 입학하여 장학금을 받았다. 기숙사 식사비 면제와 등록금 면제라는 특혜였다. “세상에 이런 곳도 있구나!” 감격스러워 우수한 성적으로 보답할 것을 다짐했다. 장학금은 미국 성도들이 한국 신학생들을 위해 매월 헌금 1달러와 2달러를 OMS라는 선교부에서 모아 지급하는 것이어서 그는 미국성도들에게 감사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교수들이 인격이 출중하고 성경연구에 정통한 분들이어서 성경강해가 매우 깊이가 있어 학생들은 수업시간마다 은혜 받았다. 특히 구약에 이명직 목사, 신약에 이건 교장 목사의 강의는 영적인 깊이가 있어 아멘의 연속이었다. 영어나 교양과목 대한 아쉬움은 있었지만, 신학교이기에 성경을 깊이 연구하는데 목표를 두고 열심히 공부했다.그런데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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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전 본지 편집위원장 )
2020.03.18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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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 해방과 더불어 광복이 왔다. 1945년 8.15 정오에 일본 왕이 라디오를 통해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지난 36년 간 나라를 빼앗기고 온갖 차별과 착취를 당한 대한인은 갑자기 닥친 광복에 놀라면서도 기쁨과 감격에 벅차 전국적으로 해방만세를 불렀다. 그러나 그 감격도 잠시, 연합국의 얄타협정에 따라 한반도 38도선을 중심으로 남에는 미군이, 북에는 당시 소련군이 진주하여 군정정치를 했다. 북한은 소련의 주도로 강제로 공산국가를 세우느라 혈안이 되었고, 남한에 주둔한 미군들은 민주적 국정을 이행하는 동안 한국인 정치세력들의 주도권 다툼으로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되어 몇 년 간 사회는 혼란스러웠다.하지만 미국에서 독립운동하던 이승만이 입국하여 미군의 지원하에 미국식 민주국가 수립을 위해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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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전 본지 편집위원장 )
2020.03.04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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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李相勳)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 1월 8일 강원도 원주군 봉산면에서 부친 이창우 씨와 모친 허성억 씨의 5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가 출생하자 이웃들이 그의 잘 생긴 외모에 놀라며, 앞으로 큰 인물이 될 거라고 덕담을 했다. 그는 자라면서도 부모에게 순종하였고, 장난을 칠 줄 모르고 늘 의젓하여, 동네 사람들이 ‘애 어른’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그가 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일본인 선생이 일본어로 여러 과목을 가르쳤다. 아예 학교에서는 우리말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자, 그는 나라 없는 슬픔을 처음 느꼈다. 선생님이 가끔 일본학교를 자랑하자, 그는 일본어를 잘 배워 후에 일본유학을 가겠다는 꿈을 꾸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1학년 때부터 반에서 가장 뛰어나게 일본어를 잘 해서 선생님의 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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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전 본지 편집위원장)
2020.02.18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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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기식 목사는 하나님께 받은 다양한 은사로 많은 기관장과 사회봉사의 리더 역할을 잘 감당했다. 그는 전국교회학교 연합회장을 시작으로 강남지방회장, 총회 교육부장, 중부지역총회장, 서울신학대학 강사 및 겸임교수(동양사상) 서울신학대학교 총동문회장, 교단의 바른목회협의회장, 한국성결신문 논설위원, 활천 편집위원, 총회 목사고시위원장 등 많다.또 대외적으로는 강남경찰서 교경협의회 회장을 비롯하여 성결교회 역사와 문학연구회 회장, 수원 기독호스피스회 이사장, 수원시기독교연합회 회장, 한국목회자협의회 상임회장. 수원 생명의전화 이사장 등 봉사활동도 화려했다. 그러나 가장 하고 싶은 것은 교육 관계였다. 그의 교육관계 활동을 꼽아보면, 전국교회학교 연합회장(1975), 전남 광주 숭의종합고 교목실장. 계명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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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전 본지 편집위원장 )
2020.01.22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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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62년 서울신학대학 졸업과 동시에 강원도 횡성군 수백교회에 총각 전도사로 첫 목회를 시작한 후, 이듬해 강원도 원성군 관설교회 전도사로 부임했다. 당시 그는 향학열에 불타서 4시간 동안 시외버스를 타고 서울에 와서 서울신대 대학원에 다녔다. 일주일에 이틀만 공부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꿈이 있기에 가능했다.그는 1965년 대학원 졸업과 함께 서울시 성북구 돈암동교회 교육전도사로 중고등부와 대학생 담당 목회자로 일하다가 군목을 지원하여 1966년 5월 총회에서 목사안수 받았다. 그러나 군목 신체검사에서 고혈압으로 불합격 판정을 받아 돌아와 돈암동교회 부목사로 시무하다 1966년 최경자 양과 결혼했다. 그리고 이듬해에 1967년 충남 연산교회 담임목사로 본격적인 목회를 시작했다.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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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본지 전 편집위원장
2020.01.15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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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기식은 1958년 2월 서울신학교 입학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했다. 그의 성적에 학교에서는 교단 목회자 자녀, 극빈 입학생들과 함께 근로 장학혜택을 그에게 특별히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그는 지방의 학생들처럼 기숙사에 입사해서 식사비를 면제 받았다.한 방에 4인이 침대 하나씩 제공받는 기숙사 생활은 비교적 자유로웠으나 반드시 지켜야 할 비교적 엄격한 규칙이 있었다. 그것은 5가지였다.1) 매일 강당에서 드리는 새벽기도회(06시)는 의무적으로 참석할 것.2) 수업 외 외출 할 경우 밤 10시 전에 반드시 돌아올 것.3) 이성 간의 우편편지는 사감이 일차 검열하는 것을 양해할 것.4) 근로 장학생들은 사감이 지정한 장소에서 소임을 다할 것. 5) 매일 밤 10시 소등 시간을 엄히 지킬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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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전 본지 편집위원장)
2019.12.24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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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기식(宋基植)은 일제치하의 1940년 9월 3일(음), 서울시 마포구 염리동에서 송상훈, 윤경열의 6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그는 6살 때 해방을 맞고 이듬해 용강초등학교에 입학, 우등생으로 공부하다가 5학년 때 6. 25 전쟁이 일어나 피난살이 하던 중 모친을 병으로 잃은 후, 그 영향으로 한 때 우울하게 지내는 등 사춘기를 일찍 맞았다. 그러나 머리가 영민한 그는 공부를 잘해 반 수석을 놓치지 않았다. 6. 25 후 처음으로 도입된 중학교 입학을 위한 제2회 전국학력고사에서 우수한 점수를 받아 당시 전국 일류 중학교인 서울중학교에 상위로 입학하여 당시 변두리학교인 마포 용강초등학교에서는 큰 경사를 맞은 듯 조회 때 그를 칭찬하고 후배들을 독려했다 한다.가정에는 새엄마가 들어와서 전실 자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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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전 본지 편집위원장)
2019.12.04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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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는 주일학교운동가들과 서울신대학 학생동아리 주일학교연구회와 조화를 이뤄 연합회가 확장되고 활기를 띤 시기다. 1954년부터 1955년 어간의 주일학교운동의 활성화를 위해 전국교회주일학교 현상배가운동을 벌였다. 동양선교부에서 성적이 우수한 10교회에 시상을 하고 그 실무를 주일학교연합회가 담당했다. 시상과 상품은 1등 피아노, 2등 확성기앰프, 3등대형오르간, 4등 소형오르간, 5~10등 기독교방송 청취용 휴대용 라디오이다. 장소가 협소한 교회에게는 대형천막을 제공하기로 했다. 제10회 교단총회는 그 실천방안의 하나로 1년에 1회 이상 지방회나 감찰회단위로 교사강습회를 개최하기로 결의하여 전국교단적인 행사가 되었다. 주일학교전국연합회는 강사를 확보하고 ‘활천’지에 강사소개와 강사알선 안내문을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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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본지 전 주필)
2019.11.13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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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성경학교와 장년성경공부 교단의 재건과 더불어 지방성경학교와 주일 오전예배 시작하기 전에 장년들의 성경공부가 성황을 이뤘다. 이것은 참석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을 정도의 것이 아니었다. 교인이면 누구나 응당 참석해야 하는 것이었다. 장년들은 예배1시간 또는 30분전에 성경공부를 하고 복습문답이 있은 후 예배를 드렸다. 성결교회는 1922년 1월에 기관지 ‘활천’ 창간호부터 만국주일학교학과를 실어 장년과 주일학교의 성경공부교재로 사용했다. 1929년 주일학교독본이 발행되어 유년부공과로 전용된 뒤부터는 “활천”에 싣는 만국주일학교학과는 장년부에서 쓰게 되었다. 성결교회는 기도와 전도, 특히 성경애독을 제1실천덕목으로 삼았다. 본래유교의 강한 영향 아래서 책을 존중히 여기는 심성이 있는 한국인에게 기
일화이야기
이종무
2019.11.06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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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학동에 위치한 숭의학원의 숭의중?숭의종합고등학교는 1958년 5월 6일 김신근 목사가 피얼스 박사의 후원을 얻어 설립했다. 김 목사는 ‘굳건한 믿음, 뜨거운 사랑, 꾸준한 노력’이라고 교훈을 정했다. 또 그는 1972년과 1974년에는 신의여자중?고등학교를 설립했다. 우리나라 산업발전을 위해 30여 년간 실업고등학교로 일관한 것이다. 특히 김 목사는 당시 문교부 당국자에게 실업교육의 절대 필요성을 역설한 실업교육 선구자였다. 1960년대에는 5회에 걸쳐 미국과 독일, 이스라엘, 덴마크, 일본 등 여러 나라를 직접 방문해 기독교 교육과 실업교육의 실태도 시찰했다. 그는 그 경험을 토대로 교육의 청사진을 그렸고, 학교를 발전시켜나갔다.대구의 정화여자중?고등학교는 도영춘 장로가 ‘여성들을 기독교
일화이야기
이종무 목사(전 본지 주필)
2019.10.16 17: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