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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은 광복되었지만 상해에 있던 일본군은 해산되지 않았고 당분간 치안유지에 힘쓰라는 승전국 미국의 지시를 받았다. 그와 조선인 군인들은 분통이 터졌고 마침내 부대를 탈출하기로 모의한 후, 24명이 한 밤 중에 병영을 탈출했다. 하지만 그들 중 12명은 붙잡혔고 그를 포함한 12명은 무사히 탈출하여 전에 알고 있던 정옥녀 할머니 집에 피신했다. 정 할머니는 유명한 안중근 의사의 제수씨로 애국자여서 그들을 며칠 동안 숨겨주었다.마침내 1945년 10월 15일 미군에 의해 일본군이 무장해제가 되면서 그들은 자유롭게 상해거리를 다니며 구경할 수 있었다. 중국 각지에서 상해로 몰려든 일본군에 징집되었던 조선인들은 육군, 해군을 합쳐 수천 명이 되었다. 중경에 주둔하고 있던 광복군 본부에서는 이들을 광복군에 편입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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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1.10.26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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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 기독교를 반대하자 그는 속으로 기도했다. “하나님. 우리 가정이 예수 믿게 해주세요.” 그가 처음으로 드린 기도였다. 해마다 겨울이면 어머니가 가슴앓이로 고생을 했는데 그 해 따라 유난히 심했다. 그는 문득 병을 고치신 예수님을 생각하고 교회에 가서 집사님께 어머니의 병을 말했다. 집사님이 와서 찬송을 부르고 간절히 기도했더니, 금방 어머니가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이제 나도 하나님을 믿으련다.” 이 기적이 신앙생활을 계속하게 했다.당시 농한기 때마다 교회에서 부흥회를 했다. 그와 친구들은 덕촌리교회 부흥회에 참석해서 새벽기도, 낮 사경회, 밤 집회 등 일주일동안 교회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은혜를 받았다. 또 어느 해는 청주제일교회에서 하는 노회사경회에도 참석하여 일주일 동안 지내며 은혜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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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1.10.19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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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만(朴鍾萬)은 1924년 9월 4일 충청북도 청원군 옥산면 호죽리라는 두메산골에서 박영규 씨의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산이 깊어 옛날에 대숲에서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해서 호죽리(虎竹里)라 불렸는데 일명 ‘범때마을’로 불리는 곳이다. 조상 대대로 체격이 큰 박 씨 가문 태생으로 그는 어려서부터 남보다 크고 건강했지만 마음은 엄마를 닮아 순한 순둥이로 자랐다.사방이 산으로 가로막힌 20여 호가 오순도순 사는 산골마을에서 그는 어려서는 마을 아이들과 산을 오르내리면서 놀았고, 가정의 작은 농사일 심부름을 하면서 자랐다. 한학을 공부하는 형에게 6살 때부터 가끔 천자문을 배우는 것이 그의 유일한 낙이었다.1934년 그의 나이 10살 때 5km나 떨어진 먼 마을에 간이 소학교가 설립되었다는 소문을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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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1.10.12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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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제일교회는 세계구호위원회의 대표 엘마 길보른 목사에게 서귀포교회 개척 지원을 청원하여 지원 약속을 받았다. 우선 서귀포에 가서 교회를 세울 건물을 수소문하던 중 휴업중인 목욕탕 건물이 있어서 그 건물 주인과 임대교섭을 했다. 그리고 서귀포읍장에게 교회를 개척하고 피난민과 영세민들을 위한 구호사업계획을 설명하며 협조를 당부했다. 읍장은 매우 반가워하며 적극 협조를 약속했다. 그러나 목욕탕건물 주인 노인은 독실한 불교신자라서 건물에 십자가가 세워지는 것을 극구 반대하며 임대를 거절했다. 임대료도 후하게 지불하고 가족들의 점심도 급식소에서 해결해주고 그의 큰 자부 미망인을 급식소에서 채용하여 인건비도 지급하겠다는 제안을 받아드려 임대하게 되었다. 1962년 8월 7일, 건물 높은 벽면 위쪽에 ‘서귀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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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
2011.10.05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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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에도 제주읍성결교회의 소식이 ‘활천’에 실렸다. 당시 제주읍성결교회의 성장과 발전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단서들이 그대로 실려 있다. “제주읍교회 소식/본 교회는 피난민 복귀 후에도 여전히 부흥 중 장년 80여명 유년 3, 40명이 회집하여 지난 12월 27일에는 조주찬(趙宙贊) 목사의 주례 하에 세례자 6일 학습인 24인이었으며 특별한 사실은 김복순 집사는 득남기념으로 만 이천 환을 바쳐 성종을 기증하였고 유지 이종열 선생도 득남기념으로 6천환을 드려 강대상을 헌납했으며 유옥란 집사와 김순애 자매는 3천환을 바쳐 유년주교 우승기를 제공하여 주께 영광을 돌린다더라”(활천 1954년 2월호 42쪽).1954년 4월 20일부터 25일까지 열린 교단 제9회 총회에서는 한 해 동안 제주선교를 위해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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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1.09.28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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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성결교회의 제1대 담임목사로 오태상 목사가 부임한 것은 1951년 9월이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성결교회 피난민 성도 몇 가정이 건입동 소재 999번지 행정당국에서 피난민에게 지원하는 천막을 배정 받아 집단생활을 시작했다. 이들은 장로교회에 출석하여 예배를 드렸다. 그러다가 천막을 치고 그 중간 사이에 나무판자로 간이 바닥건물 예배당을 세워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이 때 오태상 목사는 침술 등 의료사업을 하면서 목회를 하였다. 당시 피난민들과 원주민들의 위생환경이 열악하여 장질부사 등 전염병이 돌았다. 오 목사는 환자들이 있으면 달려가서 그들을 위해 기도해주고 진맥을 하여 약을 조제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약값도 받지 않고 침으로 시술, 그들의 질병을 치유해주었다.오 목사는 교회가 교역자 월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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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1.09.21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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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이기풍 목사가 제주도에 파송된 이후 해방 전까지 제주선교는 장로교가 주도했다. 그러다가 한국전쟁 이후 성결교회 감리교회 침례교회 순복음교회 그리스도교회 등 다양한 교단들이 제주에 설립되었다. 제주에 피난 온 사람들이 다양한 교파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성결교회가 제주에서 시작된 것은 한국전쟁기간에 제주도에 유입된 피난민들에 의해서다. 처음 제주도에 피난 온 성결교회 성도들은 장로교에 흩어져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4후퇴 시에 제주도에 피난 온 성결교인들이 1951년 5월 6일에 제주시 건입동에 천막을 치고 모여 예배드리기 시작했다. 이 때 제주교회 개척을 주도한 인물이 바로 강진국 장로다.강 장로의 가족은 1951년 2월경에 서귀포 서흥리에 정착했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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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1.09.07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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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제일성결교회 창립 60주년 및 성결교회 제주선교 60주년 기념 감사예배가 지난 5월 15일 제주제일교회에서 제주제일교회와 제주직할지방회의 소속 교회들이 함께 참여한 가운데 성대히 진행되었다. 그날의 감격이야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으로 그만큼 성결교회 제주선교가 쉽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제주도에 개신교가 전래된 것은 1908년이다. 한국장로교회에서 최초의 한국인 목사 7명 가운데 한 명인 이기풍 목사를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했다. 이것이 제주선교의 시작이다. 이기풍 목사는 1908년부터 1917년까지 성내교회개척을 위시하여 제주 전 지역에 12개의 교회를 세우는 제주선교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의 선교사역을 기념하여 조천 와흘리에 이기풍 선교기념관이 세워져 있다.성결교단이 제주성결교회의 창립을 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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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1.08.31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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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경 목사는 성결교회의 역대 목사 중 대외적으로 가장 영향력 있고 폭넓게 활동한 사람이다. 그의 초교파적 직책을 보면, 한국교회의 주요기관장을 모두 맡은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그는 직책을 맡으려고 누구에게 부탁을 하거나 음식을 대접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는 성격상 큰 직책을 맡지 않으려고 사양하여 기관의 총회에 별로 참석을 하지 않았지만, 기관의 총회에서 결의하고 또 맡아달라고 찾아와 사정을 함으로 어쩔 수 없이 맡은 것뿐이다. 이는 많은 교회기관들이 그의 온유하고 겸손한 지도력을 크게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그는 언제나 무리 없이 원만하고 화해롭게 기관을 이끌었으며, 또 직책을 맡은 이상 그는 기관의 발전을 위해 적절한 시간과 아이디어를 아낌없이 제공했다. 또한 회비는 물론 필요한 재정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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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
2011.08.24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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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경 목사는 장충단교회를 2년 만에 사임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만 전념했다. 그래서 정교수가 되고 각 학과장과 대학원장의 보직을 수행했다. 담당 과목은 조직신학이었는데 미국식 자율학습으로 학생들을 가르쳐 인기가 있었다. 학생들에게는 진보적 교수로 알려졌지만 신학은 보수였고 생활이 진보적이었다. 1975년 신학교수로 15년을 사역하면서 후학양성에 보람을 느꼈으나 목회에 대한 향수가 있었다. 외국에서 공부한 후배들이 속속 귀국하여 교수로 참여하면서 그는 후배들에게 교수직을 양보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마침 그때 서울 신촌교회에서 청빙이 왔고 목회와 신학, 역사현장 이 3가지 연결을 평소 주장한 그는 그 실천을 하기 위해 승낙했다. 그가 부임할 때 신촌교회 신자들의 신앙은 진보와 보수로 양분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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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결신문
2011.08.17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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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경 목사는 안수 받은 지 1년 만에 부산동광교회 청빙을 받아 부임했다. 그해 7월에 한국전쟁이 휴전이 되고 임시 수도가 서울로 올라가면서 부산에 있었던 서울신학교도 11월에 서울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는 ‘좋은 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유학을 가서 많이 배워야 한다’는 평소의 신념을 이루기 위해 1년 만에 서울로 돌아와 혜화동교회에서 다시 목회를 시작했다. 일부 파괴된 교회를 수리하고 피난 간 신자들이 돌아오면서 교회는 다시 부흥되었다. 그는 OMS 선교사에게 미국의 복음주의 계통 신학교의 주소를 입수한 후, 자신을 간단히 소개하고 입학 허가서를 보내달라는 서신을 몇 군데에 보냈으나 아무 소식이 없어 낙심이 됐다.어느 날, 그가 트럭을 얻어 타고 남대문 근처를 지나는데, 사람들이 길에 너무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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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1.08.10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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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하나님의 은혜로 8.15 해방이 왔고 정진경은 서울신학교 재건과 학생모집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소명에 응답하기 위해 서둘러 상경한 그는 1945년 11월 서울신학교에 입학했다. 모든 게 궁핍한 시절이었지만 정진경은 기숙사에 입사했고 신학공부가 즐거웠다. 그는 이듬해 6월 여름방학을 맞아 가족을 찾아 신의주로 가려고 했으나 38선에 경계가 심하여 어려웠다. 그는 황해도 해주까지 어렵게 걸어갔는데, 그때 공산당에 반대하는 데모군중에 섞여 있다가 함께 체포되어 유치장에 성경을 읽으며 40일 간 갇혀 있었다. 혐의가 없어 석방된 그는 걸어서 신의주에 도착하여 가족과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공산당이 종교에 대한 억압정책을 펴자 사람들마다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다. 그는 신학공부를 계속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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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
2011.08.03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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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에서 열심히 일하던 정진경 집사는 가슴에 무엇이 밀려와 터질 것 같은 느낌이 왔다. “내가 여기서 주판이나 만지고 있다니.” 그는 갑자기 일어나 주판을 바닥에다 힘을 다해 던져버리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는 근처의 교회를 찾아가 기도하고 마음에 안정을 찾고 돌아와 태연히 근무하자, 동료들이 그를 정신이 돈 사람으로 생각했다.그렇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닫지 못하고 은행 업무를 계속하다 마음의 번민을 몇 번이나 했다. 이렇게 몇 년이 지나는 동안 그는 갑자기 몸에 열과 기침이 나면서 허리가 몹시 아파 결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병원에 가서 진찰을 한 결과 늑막염과 폐침윤이라는 폐결핵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당시 폐병은 좋은 약이 없어서 거의 죽어가는 무서운 병이었다.그는 할 수 없이 회사를 퇴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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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1.07.20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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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경은 1921년 9월 14일 평안남도 안주군 한 작은 마을의 연일(延日) 정씨 희택 씨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안주는 평안도 북서쪽의 농업지대였고, 그는 가문의 11대 종손으로 귀하게 성장했다. 그는 보통학교 3학년 어느 주일 오후, 마을 서삼리교회를 지나다 처음 들어보는 풍금소리와 찬송소리에 마음이 끌려 교회로 들어가자, 여교사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렇게 그의 교회생활이 시작됐다.그는 주일마다 부모 몰래 교회에 다니다가 어느 날 발각되었다. 부친은 “얘야, 우리 가문은 전통에 따라 유교를 섬겨야지, 기독교는 절대로 안 된다”는 책망과 함께 종아리를 때렸다. 하지만 그는 주일이면 부모 몰래 교회에 갔다. 어느날 그는 교회에서 돌아오던 중 비를 흠뻑 맞은 채 길에 미끄러져 다리를 심하게 다쳤다. 그가
일화이야기
류재하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1.07.13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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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태 목사는 당대의 부흥강사 신현균 목사의 ‘성령의 바람’이란 설교를 기초로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제목의 음반으로 성가독창을 여러 곡 취입했다. 신 목사의 특징 있는 부흥 설교와 이 목사의 은혜로운 찬송은 교계에 좋은 반향을 일으켰다. 청주육군병원의 간호사들이 그 음반을 다량으로 사주었고 이 목사를 특별 초청해서 직접 불러주어 많은 감동을 끼치기도 했다.이 목사는 또한 강변교회 선교합창단을 창단했다. 동네 어머니들이 함께 모여 합창을 즐기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는 취지였다. 믿지 않는 어머니들에게도 단원가입을 허락했다. 발성연습을 위해 코르위붕겐(Chorubungen)으로 지도했다. 때로는 특별강사를 초청하여 훈련하면서 음악수준을 높였고, 이것이 널리 알려지면서 전도가 되었다. 이들은 예배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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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1.07.06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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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태 목사는 교회 내에서의 찬양사역 뿐 아니라 교단 내의 교회음악을 발전시켜야겠다고 뜻을 정하고 동지들을 규합하였으며 교단 내에서 조금씩 교회음악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켜 나갔다.이 목사의 찬송에 대한 논지는 다음과 같다. 찬송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이는 피조물의 마땅한 본분이며 하나님의 명령이기도 하다. 찬송은 속도를 중시하여 정확하게 불러야한다. 속도가 정확하지 못하면 기쁜 노래가 슬픈 노래로, 혹은 그 반대의 현상이 벌어질 수 있다. 아울러 성의를 가지고 불러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 찬송생활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그 은혜와 능력을 얻는 것이다.성도들로 하여금 찬송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게 하는 사람이 목회자이기 때문에 신학교에서나 목회자 교육에서 찬송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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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1.06.29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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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목사안수를 받은 3년 후에 삼각지교회의 청빙을 받아 부임했다. 삼각지교회는 이 목사가 부임할 때에는 교세가 약했다. 구제물자(밀가루) 때문에 가난한 신자들이 모여들었는데 대부분이 용산역 앞의 옛 방공호 속에 사는 사람들과 교회 근처의 판잣집, 한강의 천막촌 사람들이었다. 이 목사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서 영적인 복, 육적인 복, 물질적인 복을 받자고 강조하면서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랬더니 십일조를 하는 사람이 생기고 그들의 생활이 점점 좋아지기 시작했다. 교회는 날로 부흥일로를 맞게 되었다.1967년 무허가 건물철거로 신자의 70~80%가 감소되었다. 교인들은 ‘빈자리 채우기 운동’에 힘을 썼고 ‘전교인 십일조 바치기 운동’에 참가했다. 당시 이 목사는 전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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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1.06.22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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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태 목사는 1954년 봄, 전담사역자의 길을 걷고자 홍은교회를 자원하여 부임했다. 15평 되는 집터만 있는 홍은교회에 부임하여 7~8평 되는 한 성도의 집 2층에서 예배를 드렸다. 매주 성도들이 늘어나서 집터 4개에 해당하는 50여 평의 대지를 확보하여 콘센트 막사를 세우고 헌당식을 가졌다. 그는 신앙이 어린 신자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헌금하지 않아도 좋으니 교회만 잘 나오라고 얘기했지만 신자들은 잘 나오지 않고 교회가 부흥이 되지 않자 목회에 대한 의욕을 잃고 홍은교회를 사임했다.그동안 고등학교 강사료로 생활을 했는데 그것마저 끊어져 생활이 어려웠다. 그는 이명직 교장선생님을 찾아가 홍은교회를 사임한 이유를 말했고 이명직 목사는 “헌금을 하지 않아도 좋다는 말이 성경 어디에 있소? 바치는 것
일화이야기
이종무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1.06.15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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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태 목사! 그는 중후하면서도 인간관계가 풍부하고 폭넓은 전문지식의 목회자로, 교수로, 부흥사로, 교회음악전문가로, 교수로, 총회장으로 선교사로 평생을 일관되게 하나님의 복음을 널리 전하는데 열성을 기울인 지성 영성이 조화된 목사였다. 특히 교회음악의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교회음악을 발전시킨 공로자였다. 이 목사가 예수님과 처음 만나게 된 것은 해방 후의 일이다. 친구 가운데 유영근이 있었다. 유영근은 북한으로 납북된 독립문성결교회의 담임 유세근 목사의 아우로서 훗날 침례교 총회장을 역임하게 된다. 유영근은 한 주도 거르지 않고 주일아침마다 찾아와 교회에 함께 가자고 권면했다. 하도 집요하게 찾아와 귀찮다는 생각에 한 번은 무안할 정도로 야단을 쳐서 쫓아 보내고서 ‘이제는 안 오겠지’ 하면서도
일화이야기
이종무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1.06.08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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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 사랑을 철저히 실천하는 그는 이웃 사랑의 개념이 신앙적 확신이 되었다. 그래서 이웃 사랑에 관한 논설을 1963년부터 1970년까지 교단 기관지 활천에 계속 투고, 게재되었다. ‘성경해석에 주의 할 일’, ‘올바른 신앙노선’, ‘성서해석과 역사적 배경’, ‘종교 병’, ‘성서연구에 관한 견해’, ‘과학과 종교’, ‘기독교인의 경제생활’ 등 12편이 그것이다.그는 또 재직하는 경북대학교의 학보와 대구의 ‘매일신문’에도 자신의 소신을 담은 글을 자주 게재했다. 그는 발표된 글을 모아 ‘올바른 성서관’이란 제목의 책을 1974년에 발간했다. 그런데 이 책을 본 그의 교회 모 장로에 의해 그의 성서관에 문제가 있다고 당회에 고발을 당했다. 그래서 당회는 오랫동안 갈등이 야기되었고 얼마 후 당회장 홍 목사에
일화이야기
류재하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1.05.27 09: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