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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살 청년이 된 이기웅은 신명기 28장을 읽던 어느 날, 민족의 구우리 민족이 광복을 찾은 후, 이기웅이 독립투사임을 안 서산 군민들은 그를 중앙정부 연락위원으로 선출했고, 또 정의청년대가 결성되자 초대 대장으로 피선, 해방 후 공백기에 치안 유지에 힘을 썼다. 그 후 그는 서산중학교 교사에 임명되었다.하지만 1945년 11월 서울신학교가 복교되자 이기웅은 잠시 동안 정치운동에 치우쳤던 자신의 생활을 반성하고 이를 정리, 서울신학교에 복교한다. 그는 세상에 대한 정치적인 활동에 미련을 버리고 청년 동지들과 결별 입장을 밝혔고, 친한 동지들은 나라를 위해 일하자며 신학교 복학을 만류했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 나라의 종으로 헌신한 그의 마음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신학교에 복학한 후 이기응은 194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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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왕근 목사( 대신교회)
2012.03.28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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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살 청년이 된 이기웅은 신명기 28장을 읽던 어느 날, 민족의 구원에 대하여 심히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게 됐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 민족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은 결과로 나라가 일본에게 망하게 되었다고 깨달았고 민족복음화에 대한 열망에 불탔다. 동시에 그는 우리 한민족을 강제로 지배하는 일본의 불의함에 더욱더 항일의지를 불태우게 되었다.1940년 이기웅이 충남 서산읍에 있는 상춘학원 교사로 재직하고 있을 때 일본은 조선어를 가르치지 못하게 했고, 그 대신 일본어 상용화 정책을 우리 백성들에게 강요했다. 이때 그는 일본의 교육정책에 반대하여 조선어 교육을 강행했다. 결국 그는 일본 경찰과 학무 당국에 불려가 엄한 문초를 받았다. 그런 압력에도 이기웅이 굴복하지 않자, 일본은 그를 상춘학원 교사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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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왕근 목사(대신교회)
2012.03.21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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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도록 땅을 진동시키고 하늘에 메아리치던 해에 이기웅은 12월 16일 충남 당진군 고대면 용두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도의 씨의 4남매 중 막내아들로 출생한 그는 일곱 살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었다. 그의 아버지는 수완이 좋은 사업가로 사금광을 하면서 술자리가 많아 허랑방탕한 생활을 했다. 아버지의 사업은 잘되다가도 갑자기 잘 안 되는 등 부침이 심했고 그는 가정을 잘 돌보지 않았다.이기웅은 아버지 때문에 속병을 앓다가 돌아가신 어머니를 날마다 그리워하며 울었는데, 이것이 아버지에 대한 반감이 되었다. “나는 아버지처럼 살지는 않겠다”는 각오를 굳게 다지고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는 아버지로 인해 입은 상처 때문에 술이 미웠으며 그래서 독학으로 공부를 열심히 하면서 마음을 달랬다. 그가 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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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왕근 목사(대신교회)
2012.03.14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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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철 목사가 성직자로 헌신한 이후 그의 사역 과정에선 독립운동의 모습을 찾을 길이 없다. 그러나 그가 복음사역을 하면서 효과적인 독립운동도 했다는 견해도 있다.(傳統과 時論. p.145) 첫째, 많은 외국인 선교사에게 한인의 독립 열망을 적극적으로 알릴 수 있었고 신학생들에게 숙식을 같이 하면서 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 둘째, 독립공채모집을 효과 있게 전개했다. 최영택 장로와 같은 경제적으로 능력 있는 교인들, 동향 출신인 동화약방(현 동화제약) 사장과 세브란스 병원장 이영준 박사, 철제병원장 등에게 독립공채를 인수하게 했다. 셋째, 동양선교회 상무이사, ‘활천(活泉)’ 주간으로 있을 때는 보다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려고 했고 그의 장남 이병희 집사는 다락방에 감추어놓은 공채를 목격했다고 한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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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2.03.07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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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철은 경성성서학원을 졸업하자마자 교단 요직의 실무를 맡아 일했다. 1923년 ‘활천’ 창간에 관여하였는데 사장 길보른 총리의 권유로 주필 이명직 목사의 지도를 받으며 창간준비에 몰두했다. 그는 ‘활천’의 체제, 기사, 독자모집 및 경리방침, 인쇄소 선택, 제3종 우편물인가, 진체구좌 설정 등의 업무를 사실상 담당하여 업무를 수행했으며 성서학원 교수로도 봉직했다.그는 1926년에는 성서학원 대강당구령회의 책임자로 임명되어 교단의 영적지도자의 반열에 오른다. 1927년 5월부터는 편집사무와 서무를 겸임하여 보다가 편집사무만 주력하기로 했으며 1928년에는 ‘활천’ 편집부장으로 임명되고 성서학원 교수로 봉직하면서 교단의 재무실무책임자, 동양선교회기부금 실무, 성서학원 서기, 사감, 중앙사무국 재무과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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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2.02.29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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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의 불길이 대구 달성을 중심으로 경북 전 지역에 확산되자 일경은 이 사건에 수사력을 총집결하였고 김달문과 김은수가 체포되기에 이르렀다. 일본 경찰의 고문으로 인하여 이상철이 독립운동 배후세력의 주동자임이 드러났고 이상철은 일경의 추적이 심해지면서 거점을 현풍교회당으로 하면서도 숙소를 자주 변경하며 독립운동을 계속했다.경북지역에서 독립운동이 더욱 확산되면서 일경의 수사가 집중 강화되었고 동지들의 독립투쟁이 제약을 받게 되자 수사의 초점을 흐리게 하기 위해 이두산 장군이 위장 자수했다. 하지만 오히려 독립운동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고 국내주동자가 이상철임이 재차 판명, 이상철이 은신한 교회 기숙사가 경북수사대의 급습을 받았다.마침 철야 기도하던 성도들의 도움으로 이상철은 담을 넘어서 유가면 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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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2.02.16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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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철 등은 독립운동을 조직적이고 지속적으로 하기 위해 상해임시정부와의 긴밀한 연대가 필요함을 절감했다. 이를 위해 계성학교동기생 이두산을 상해임시정부에 참여시켰고 이상철은 상해임시정부공채위원, 대구 달성군 교통사무국장의 임무를 맡았다.당시 이상철 위원은 다음과 같은 투쟁목표를 세웠다.첫째, 대구·달성 지역 내에 있는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수족이 되어 애국지사들의 독립운동을 정탐하여 밀고하는 자, 일본제국주의 식민지정책에 협조하여 그들의 침략을 가능하게 하는 대한인 관공리, 일본제국주의의 기관에 종사하는 자, 협조하는 자에게 경고문을 발송·전달하여 그들에게 대한독립사상을 일깨워주고 관리직을 사임하고 독립투쟁 대열에 참여케 한다.둘째, 상해임시정부의 독립투쟁을 위한 재정지원을 위해 임시정부발행 공채를 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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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2.02.08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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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철 목사는 한국성결교회 발전의 큰 공로자였다. 독립운동가였던 그는 일경에 쫓기는 신세가 되고 피신행각으로 전전하다가 경성성서학원(서울신학대학 전신)으로 은신했고 여기에서 나라의 독립운동에 바쳤던 그의 정열을 쏟아 한국성결교회에 이바지했다. 그는 경성성서학원을 졸업하자마자 모교의 강사가 되고 교단의 기관지 ‘활천(活泉)’의 핵심간부로 일했으며 성서학원 서기, 교수, 사감, 이사국 직원, 문서주임, 학무부주임 등의 요직으로 헌신하여 한국성결교회의 근착과 성장 발전에 큰 족적을 남겼다. 이상철 목사는 성결교회의 교부로 불리는 이명직 목사의 후계자로 지목되기도 했으나 애석하게도 37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 그것은 과거 천재들이 흔히 가던 길이기도 했다. 이상철은 1897년 1월 8일 경상북도 김천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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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2.02.01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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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마지막 아홉 번째 은혜는 그가 아군을 따라 후퇴할 때였다. 아군폭격기가 교량마다 폭파하여 중공군 진입을 막을 때, 그가 다리를 건넌 후에야 다리가 폭파되어 구사일생했고 남한에 와서 북한에서 못다 한 성역을 계속 할 수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인도로 경상도 김천교회에서 목회할 때 남한에 먼저 온 3남매를 모두 만날 수 있었다.1951년 4월 부산에서 피난신학교가 개교하자 그는 교수로 부름을 받아 부산에서 후진을 양성했다. 1953년 휴전과 함께 정부가 서울로 환도하자 서울신학교도 서울로 와 건물을 수리했고 그도 교수로 봉직했다. 그의 설교가 은혜롭고 문학적이어서 상도동교회 목회까지 겸임했으나 나중에 양자택일하라는 총회의 명령에 교역자양성이 더 소중함에 따라 교수만 전념했다.그의 학문은 교수 역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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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2.01.18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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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문이호는 3년간의 성서학원을 졸업하고 평양신흥교회로 파송 받았다. 개척교회를 섬기다 제법 안정된 교회에 가서 몸과 마음을 다해 열심히 일하며 섬기자 교회가 나날이 부흥, 2년 후에는 빈자리가 없을 정도가 됐고 교회를 다시 크게 짓자는 여론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 때는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전쟁을 치루기 위해 경제가 궁핍한 때라 참았다.1943년, 일제는 성결교회의 재림사상을 트집 잡아 봄에 경성신학교를 폐교했다. 5월에는 성결교회 교역자를 전국에서 체포, 경찰서에 구금했다. 문이호도 평양경찰서에 수감되어 날마다 형사가 몽둥이로 위협하고 공포분위기 속에서 심문 당했다. 하지만 그는 신앙양심에 거리낌 없이 지혜롭게 대처하면서 옥중의 바울을 생각하고 몇 개월 동안 기도하며 인내로 버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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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2.01.11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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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체험을 한 그는 마음에 평화와 기쁨으로 살았다. 어서 아이들에게 이 귀한 복음을 전하고 싶어 주일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주일 아침이 그는 다니던 장로교회에 환한 얼굴로 일찍 갔다. 그런데 주일학교 예배가 시작되기 전, 담임목사가 그를 목사의 방으로 불렀다. “문 집사. 성결교회는 이단인데 왜 그곳에 갔습니까?”, “저는 은혜 받아 중생했는데, 이단이라니요?”, “자네가 학교 선생을 했다면서 그걸 모르나? 신앙은 지식이지, 감정이 아니란 말일세.”, “지정의를 고루 구비해야지, 지식만 가지고는 참된 신앙이 아니지요.”, “뭐? 이제 자네가 나를 가르쳐? 모르고 갔다면 용서할테니 시말서를 쓰게.”, “은혜 받아 충성하려는데, 웬 시말서입니까? 전 못 씁니다.” 그는 문을 박차고 나와 버렸다.예배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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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2.01.04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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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호는 어느 정도 집안 정리가 되자 그를 알아보고 찾아 온 동하사립학교 교장의 권유로 면 소재지 동하보통학교에 출퇴근하면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는 몸이 크고 씨름 잘하는 장사여서 체육시간에는 모래판에서 아이들에게 씨름을 가르쳐 전통문화를 익히게 했다. 어느 날, 큰 아들 경식이를 보니 제법 키가 커서 새삼 놀랐다.“경식이 너, 몇 살이니?” “나, 일곱 살이야요.” “뭐, 벌써 일곱 살?” 그는 깜짝 놀랐다. 그는 아이들의 공부를 위해 속히 도시로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모친을 설득한 후, 모든 농토를 팔고 온 가족이 선천(宣川)으로 이사했다. 선천은 그가 서울로 왕복할 때마다 기차를 탔던 경원선 역이 있는 곳, 문물이 발달한 문화의 도시였다.그는 선천에서 만난 사람의 권유로 망해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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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1.12.28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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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호(文履浩)는 21세기가 시작되던 1901년 10월 20일 평안북도 용천군 동하면 상인동, 돌고개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출생은 마을 사람들에게 화제가 되었는데, 이는 그의 집이 위로 딸만 둘을 두었다가 오랜만에 아들을 낳은 부잣집이기 때문이다. 그의 20대 할아버지는 고려시대 중국에 갔다 돌아올 때 붓 속에 목화씨를 숨겨 들여와 한반도에 퍼뜨려 따뜻한 무명옷을 입힌 공로로 충성공이 된 문익점으로 문이호는 그 후손이었다.대대로 부농으로 살아온 그의 부친 석환 씨는 천재여서 고종 때 과거에 급제한 후, 탁지부 주사로 있으면서 일본의 명치유신처럼 조선을 개화하려는 개화파 박영효와 친한 사이였다. 1884년 김옥균, 박영효 등 개화파들이 일본군의 도움으로 갑신정변을 일으켜 고종을 옹위한 후, 민씨 세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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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결신문
2011.12.21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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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세광은 성결교회재흥총회 의장으로 성결교회 재건을 위해 온 힘을 다했다. 그는 성결교회 재건이 마무리 되자 미련 없이 지방으로 다시 떠났고 성결교회 부흥을 위해 힘썼다. 목포교회에서 시무하면서 호남지역의 전도에 주력하였고 제주교회 개척에 박차를 가하다가 천안, 대구, 통영, 부산에서 목회했다. 그는 각 교회에서 목회하면서 헌신의 사역으로 교회를 튼튼히 하는 일에 전심전력했다.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에는 십자군전도대 재조직에 참여하여 제3대 대장(隊長)을 맡아 충주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원주, 안동, 의성, 보촌, 묵호 등에 교회를 개척했다. 열정의 사역으로 그는 36년간의 복음사역 기간 동안 결신자 총 7만6294명과 교회개척 38곳 등의 놀라운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특히 천세광 목사는 전도에 대한
일화이야기
이종무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1.12.14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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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세봉은 6·10만세사건에 관련되어 1개월여 옥고를 치르고 나온 이후 성서학원에 복학하여 1928년 졸업했다. 부흥운동가 이성봉 목사와 김정호 김연옥 한인업 목사 등이 그의 동기였다. 그는 성서학원 재학 중인 1927년 조치원교회 전도사로 파송된 것이 목회의 시작이었다. 1933년 4월 조선예수교성결교회 제1회 총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1934년 제2회 총회에서 일본 도쿄 한인성결교회 담임목사로 파송 되었으나 4개월 후에 곧 귀국하게 된다. 그가 급히 귀국하게 된 것은 6·10만세 사건의 전력으로 인해 불량선인으로 낙인찍혀 일제의 감시와 간섭을 받은 결과라 볼 수 있다. 그는 도쿄교회에 부임하기 전 김해에서 시무할 때 문서선교를 통한 민족복음화와 민족의식 구현에 주력했었다. 그가 편집한 계간지 ‘영남성
일화이야기
이종무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1.12.07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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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성서학원 교사 낙성 기념 전도집회에 참여한 천세광은 신학생과 교인들의 참 기쁨에 가득 차 찬송을 부르며 간증하는 모습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 자신은 염세주의에 빠져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한 채 자살을 생각하고 있는데 똑같은 시대적 상황 속에서도 자신과는 전혀 다른 모습에서 뭔가 불변의 진리에 사로잡혀 숨김없고 자신 있는 삶을 살아가는 교인들의 모습 속에서 다른 세계가 있음을 깨달았다.이명헌 목사의 설교도 그러했지만 교인들의 순수하고도 진실 된 모습, 그리고 40일 기도회를 마친 신학생들과 목회자들의 열정있는 찬양 속에서 그 생명력을 느꼈다. 죽음만을 생각하던 그에게 생명을 확인시켜주는 종교였다. 이 생명의 종교를 통해 ‘조국광복’이란 현실적인 과제를 풀어나갈 수 있다는 확신도 갖게 되었다. 나를
일화이야기
한국성결신문
2011.11.30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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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세광은 1904년 4월 7일 경북 군위군 소보면 보촌 마을에서 비교적 부유했던 천기선(千冀善)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 밑으로 네 동생이 있었다. 천세광은 조부로부터 ‘만득장손’이라 하여 귀하게 여김을 받으며 성장했다. 조부는 구한국시대 경복궁 오위장(五衛將)으로 있었으며 한 때 청나라의 원세개(遠世凱)와 함께 활동하다가 낙향한 무반출신이었다.조부는 독실한 불교신자였으나 부친은 평범한 유교선비였다. 그가 여섯 살 되었을 때 부친은 그를 동네 서당에 보내 한문공부를 시작하게 했다. 그 무렵 조부가 술객 한 사람을 데려오더니 천세광의 사주를 보이며 장래운명을 점치게 했다. 그 술객은 “단명별세(短命別世)하니 산에 들어가 수도하라”는 점괘를 주고 갔다.장손의 명이 짧다는 술객의 말에 충격을 받은 조부는
일화이야기
이종무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1.11.23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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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결교회에 대포(大砲), 중포(重砲), 소포(경포, 輕砲) 별명이 붙은 세분 목사가 있었다. 대포 천세광 목사, 중포 최창도 목사, 소포 김정호 목사였다. 통틀어 삼포(三砲)로 통했다. 천세광(千世光) 목사(본명 千世鳳 천세봉)는 장수와 같은 거구로서 성스럽고 시원시원하고 호탕한 용모에 카이저수염을 하여 카리스마가 풍기고 호감을 주는 인상이었다. 그는 천둥이 울리듯 우렁찬 목소로 청중에게 감동과 확신을 준 교단적인 전도자·부흥사·목회자였다. 그는 나라의 독립과 민족복음화를 위해 일제의 탄압에 맞서서 6·10만세운동과 신사참배 반대 등으로 옥고를 치른 애국애족의 복음신앙가였다. 그리고 전도대장의 대명사이기도 했다. 1926년 4월26일, 조선의 마지막 국왕이며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세상
일화이야기
이종무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1.11.16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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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만 목사의 목회는 큰 도시 대전에 와서 더욱 크게 빛을 발했다. 그는 초교파적 활동에도 적극 참여하여 1966년에 대전기독교연합회의 회장으로 피선되어 성결교회의 위상을 높였다. 남대전교회의 대성전 건축과 함께 지역 내에 교회의 다양한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교회가 급성장했고, 그의 폭 넓은 지도력을 요청하는 곳이 쇄도하게 되면서 그는 적극적으로 임했다.그는 1981년 5월, 제36회 교단 총회의 부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이듬해 5월 10일 새 성전 봉헌식을 드린 후, 12일부터 남대전교회에서 제37회 총회를 성대하게 개최하고 총회장에 추대되었다. 총회의 장소인 남대전교회는 그의 풍채만큼이나 크고 우람했으며 편리한 교육관과 식당을 활용하여 은혜롭게 총회를 마쳤다.이 후 그는 교단의 중요 요직인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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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1.11.09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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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박종만이 신학교 2학년 때 송인구 전도사가 전임하면서 청주 송정교회에 부임했다. 그는 첫 목회지에서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해서 1년 만에 20명 신자가 60명이 되었다. 그는 곧 청원군 용정장로교회의 청빙을 받고 전임하게 된다. 그는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서울에서 공부하고 토요일에 내려와 심방하고 주일에 설교했다. 1950년 4월이었다.그해 6월 25일. 주일 낮 예배를 마치고 나자 청주에 갔다 온 사람들이 38선에 전쟁이 일어났다고 했다. 그때 시골은 라디오도 별로 없던 시절이라 그는 동네 부잣집에 가서 라디오를 들었다. 새벽에 북한 인민군이 38선 전역에서 남침하여 탱크로 밀고 내려오고 있다면서 국방경비대가 용감히 저지하고 있다고 방송하자 그는 며칠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나 사흘 만에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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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
2011.11.02 13: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