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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기선(文夔善) 장로는 신앙양심에 따라 법을 운영한 정의로운 법관이었다. 그는 암울한 일제시대, 그리고 8.15 광복 후 건국의 뿌리를 내리기 위한 혼란의 시대, 남북분단과 6.25 전쟁의 동족상잔시대, 자유당정권 말기의 부정부패와 4.19 혁명 5.16 군부정권으로 이어지는 격동의 시기에 법을 다루는 법관으로서 신앙양심을 지키고 믿음의 본이 된 성결교회 장로이다.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고 자신에게는 철저히 엄격하고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체험을 증거 하면서 성결한 삶을 살아간 주님의 제자였다. 문 장로는 1896년 4월2일 서울 당주동(唐珠洞)에서 부친 문규복(文圭復) 씨와 모친 순흥 안 씨 사이에서 팔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 문 씨는 구한말 고종황제를 친히 모셨던 시종무관으로 한성(漢
일화이야기
이종무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3.03.20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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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남석은 서울신대에서 공부하면서 오후에는 학교 뒷산에 올라 사명을 위해 기도했다. 기도할 때마다 가슴이 뜨거워지며, 불쌍한 영혼들이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환상을 보았다. 그는 졸업할 때까지 기다릴 수 없어, 1학기를 마친 후 부모님을 찾아 원주 수백교회로 가서 개척교회를 할 결심을 밝혔다. 어머니 임 전도사는 “할렐루야!”로 승낙했고 두 모자는 개척지를 위해 기도했다. 마침내 그는 수원의 외곽 화서지역의 싼 대지 100여 평을 매입한 후, 그곳에 천막을 치고 화서제일교회 간판을 붙였다. 이 소식에 임 전도사는 수백교회를 사임하고 가산을 정리하여 온 가족이 주 전도사의 목회를 돕기 위해 합류하였으며 매일 뜨거운 기도로 하나님께 매달렸다. 당시 이곳은 미신이 매우 성했고 또 우범지대여서 불쌍한 영혼들의 구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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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결신문
2013.03.13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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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교회 7년 동안의 봉사로 교회가 자리를 잡자, 이 목사가 임 전도사를 원주제일교회 전도사로 부르고, 무장교회에는 갓 신학교 졸업한 남 전도사가 부임했다. 그러다 몇 년 후, 산골의 수백교회에 교역자가 없어 이 목사의 권면으로 그곳에 가 열심히 섬겨 교회를 부흥시켰다.당시 유능한 장교육성을 위한 국방부의 계획에 따라 주남석 소위는 원주대학에 입학하여 1974년에 졸업할 때 중위였다가 1976년 대위로 진급하며 최전방 근무로 발령 받아 가면서 장군이 될 꿈을 품었다. 하지만 최전방에 가족이 동행할 수 없어, 주 대위 혼자 최전방 7사단 작전사령부 작전과장으로 부임, 충실한 업무수행으로 해마다 부대표창을 받았다.주 대위 아내 오은경 집사는 아이들과 함께 원주에 남아 원주제일교회를 섬겼다. 어느 금요철야
일화이야기
류재하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3.03.06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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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순 집사는 예수를 믿기로 결심한 남편과 함께 열심히 화정교회에 다녔고 남편의 거듭남을 위해 새벽마다 기도했다. 그녀의 기도 응답인가! 몇 달 후, 농한기에 열린 이성봉 목사의 부흥성회에서 남편이 큰 은혜를 받았고 거듭났다. 이제 그녀의 집은 가정천국이 이루어져 새벽부터 밤에 잠 잘 때까지 찬송과 기도가 계속 되었다. 그녀는 남매를 원했는데, 주님의 은혜로 임신하여 딸을 낳았다. 아들 낳은 지 8년만의 경사였다.기도하면 반드시 응답되는 경험은 임 집사를 더욱 열심히 교회를 위해 봉사하게 했다. 병든 자들이 찾아오면 치유기도를 하고 구역장, 교회학교 교사, 여전도회장 등 교회의 주요 보직을 맡아 열심히 봉사했다. 그리고 봉사의 능력을 얻기 위해 날마다 교회에서 철야기도를 했다.그녀의 목회자 섬김은 각
일화이야기
류재하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3.02.27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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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순은 주일에 교회에 가지 못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하루는 기도를 한 후에, 남편에게 아들을 낳은 한나의 얘기를 들려주며 주일 예배를 교회에서 드려야 하나님이 복이 주어 아들을 낳게 한다고 허락을 요청했고, 남편이 아들을 얻는다는 말에 교회 가는 것을 허락했다. 그녀는 시집에 온 후 처음으로 주일 낮 예배에 참석하니 감격의 눈물이 나왔다. 그녀는 예배가 끝난 후에도 늦게 까지 구석에 앉아서 간절하게 기도했다. “하나님. 아들 하나만 주세요. 그러면 사무엘처럼 주의 종이 되게 바치겠나이다.” 6개월 후, 기도의 응답이 왔다. 어느 날 아침에 그녀가 밥을 하다 입덧을 했다. 시댁 식구들이 좋아하면서도 아들 아니면 소용없다고 타박을 했다. 그녀는 기도의 응답인 줄 알기에 담대하게 “틀림없이 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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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3.02.20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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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순(林鍾順)은 1923년 1월 22일 전북 익산군 낭산면 용기리에서 한의사 임경옥 씨의 3남매 중 둘째로 출생했다. 당시 일제 강점기의 농민들은 일제의 수탈로 가난하게 살았지만, 그녀는 집이 한의원 덕에 비교적 여유롭게 살았다. 부모가 신자인 그녀는 어려서부터 마을의 교회를 다니며 성경을 배우고 찬송가를 즐겨 부르며 행복하게 성장했다.그녀는 초등학교 졸업 후, 세례를 받고 주일학교 교사로, 성가대원으로 열심히 봉사했다. 특히 겨울 농한기마다 2주간 실시하는 노회 사경회에 참석하기 위해 함열읍에 가서 성경을 배웠으며, 기도하는 것도 배우면서 신앙이 크게 성장했다. 그녀는 신앙의 기쁨을 누리며 “나도 전도사님들처럼 주의 종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가졌다. 그녀가 17세가 되자 부모는 그의 결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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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3.02.08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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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송교회의 건축 이야기정 집사는 마을 뒤에 자리한 야트막한 야산 땅을 임대하여 도지(賭地)를 주기로 하고 교회를 건축하게 되었다. 당시는 6·25 전쟁으로 강산이 초토화되고 경제사정이 피폐하여 개척교회 건축이 쉽지 않았다. 자재도 구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가급적 건축비를 절감하여 교회를 건축해나갔다. 십자군 전도대원 가운데 이영계 집사와 오종석 집사는 목수였는데 그들에 의해 시공이 되었다. 그러나 교회건축의 재료와 비용에 대한 재정적인 충당은 정 집사의 몫이었다. 남편은 교회에 출석하지 않았지만 많은 외조를 해주었다. 재정장부를 정리해주고 물자와 재정조달에 자문을 해주었고 정 집사가 교회를 위해 밖으로 동분서주할 때에는 안살림까지 맡아 주었다. 교역자를 모실 수 없기 때문에 정 집사와 고등학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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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본지 전 주필)
2013.01.30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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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교회에서는 최창규 집사를 전도인으로 세워 오전에도 예배를 인도하며 교회를 이끌어가도록 했다. 교회가 차츰 성장하고 있을 무렵, 전도인의 동생이 미죽교회 처녀와 결혼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교회에 큰 시험을 가져왔다. 당시 처녀의 집안은 반상(班常)의 차별이 심하고 유교적인 인습에 젖은 완고한 문중이었다.연애결혼을 엄하게 경계하였을 뿐더러 더욱이 신부 집안은 양반(兩班)에 속하는 가문인데 반해 신랑 집안은 상인(常人)이어서 신부 문중에서 거세게 반대했다. 그 반대를 무릅쓰고 혼인을 고집하여 여자는 문중에서 축출되었고 결혼식도 치르지 못하고 동거생활에 들어갔다. 교회는 ‘연애당’이라는 거센 비난과 함께 문중과 마을의 여러 남정네들이 부인과 자녀들에게 교회에 다니지 못하게 핍박을 가하여 교인이 절반 이하로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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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본지 전 주필)
2013.01.23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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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화 집사는 슬하에 6남매를 두었으나 그 가운데 2남 1녀를 잃고 실의에 빠져 종교를 통해 극복하려 했다. 본래 유교적인 가문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유교를 숭상했었지만, 가난에 찌들고 자녀를 잃게 되고 농토가 유실되어 삶의 기반이 흔들리자 한때 무당을 불러 푸닥거리를 하거나 북두칠성에게 치성을 하는 등 미신과 잡신을 섬기다가 어느 여승의 권고로 불교를 숭상하여 열심히 절에 다니며 불공을 했다.그녀는 1938년에 충남 천안시 풍세면 가송마을로 이주한 후 세 살 막내 아들이 홍역으로 세상을 떠나는 슬픔을 당했다. 그녀가 막내를 잃고 깊은 실의에 빠져 있을 때 소정성결교회 이일백 전도사가 전도했고 그녀는 그리스도를 영접했다. 소정교회는 그가 사는 마을에서 2㎞의 거리에 있고 밤에는 가끔 늑대가 출몰하는 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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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본지 전 주필)
2013.01.02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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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화 집사는 1897년 7월 28일(음) 충남 성환 매곡마을에서 부친 정태영(鄭泰永)과 모친 어(魚) 씨의 2남 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1914년 12월 충남 아산시 탕정면 신리의 이민기의 장남 이만영과 결혼했다. 1938년 기독교에 입문한 후 미죽교회와 인천산곡감리교회 개척멤버로 헌신했고, 가송교회를 개척하여 수년 동안 예배를 인도하며 교회를 이끌어갔다.그는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고 근면하여 부모의 가사를 도와가면서 독학으로 글공부에 열중하였다. 처음에는 글방 공부를 한 언니에게 글을 배웠으나 핀잔을 하며 머리통에 꿀밤을 주는 것이 싫어서 어깨 너머 공부로 글을 익혔다. 키로 쌀을 까불어 바닥에 겨가 쌓이면 그 위에다 손가락으로 글씨를 쓰면서 글을 익히거나, 가느다란 막대로 땅바닥에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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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본지 전 주필)
2012.12.26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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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혜로 1945년 8월 15일 조국이 광복되었고 그 해 9월에 성결교회 목회자와 성도들은 서울신학교 강당에 모여 눈물로 광복 감사와 성결교회 재흥예배를 드렸다. 함열교회도 장석초 목사의 주도로 교회 재건예배를 드렸으며 화정교회도 재건했다. 얼마 후, 장석초 목사의 권면으로 류응현 집사는 화정교회 신자들의 절대적 지지 속에 장로로 피택을 받았다. 그리고 지방회의 시취를 거쳐 마침내 1949년 7월 5일에 화정교회의 설립자인 그가 제1호 장로로 장립을 받았다. 바로 그날은 화정리 마을의 큰 잔칫날이었다. 그의 전도로 마을의 30%가 신자였기 때문에 마을사람들이 거의 모인 큰 잔치가 되었다.그가 장립식을 마치고 난 후, 당시 25세 된 큰아들 승규를 불렀다. “승규야, 나는 네가 주의 종이 되기를
일화이야기
류재하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2.12.18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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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응현은 동네 사람들을 하나 둘, 전도했다. 주일에 함열까지 데리고 다닌 사람들이 어른 10여명, 청소년 10여명이나 되었다. 하지만 바쁜 농번기가 되면 대개 사람들은 교회가 너무 멀다는 핑계를 대고 교회출석을 거부했다. 그래서 그는 자기 동네에 교회를 세우기로 작정하고 교회에 가서 당시 함열교회의 담임 송창현 목사와 상의해 허락을 얻었다.마침내 1931년 7월 10일 새 신자인 류응현의 가정에서 함열교회의 첫 지교회인 화정리교회의 개척예배가 드려졌다. 1920년 창립된 함열교회는 시골교회로서 자립하기 힘든 처지였지만, 사람들을 구원하려는 그의 마음에 감동하여 지교회로 화정리교회를 개척한 것이다. 그때 그는 아직 학습이나 세례도 받지 못한 새 신자에 불과했다는 점에서 이는 놀라운 일이었다.그러나 그의
일화이야기
류재하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2.12.12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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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응현 씨는 처음 믿기 시작할 때부터 새벽기도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부흥회 때 이성봉 목사가 “기왕 예수를 믿으려면 잘 믿어야 하고, 잘 믿으려면 새벽기도를 해야 한다”고 간곡하게 말했기 때문이다.그의 집에서 함열성결교회까지는 약 3km가 되는 거리였다. 그는 머슴 생활의 습관 때문에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 7살짜리 큰 아들 승규를 깨워서 교회에 데리고 다녔다. 승규는 한참 잠이 많을 때여서 잠을 깨우면 앙탈을 부렸지만, 그때마다 좋은 말로 달래고 옷을 입힌 후, 새벽 산길을 함께 달려 교회로 갔다.가는 도중에 소나무 숲에 이르면 그들은 길을 멈췄다. 그리고 아버지가 큰 소나무 위로 올라가서 가지 위에 발을 얹고 마구 흔들면 굵은 솔방울들이 우르르 떨어졌다. 그러면 아들은 목도리처럼 목에 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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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결신문
2012.12.05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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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머슴살이 10년 만에 가정은 극심한 가난에서 면할 수 있었다. 형은 장남이어서 부친으로 받은 밭떼기 얼마를 차지해 살았고, 그는 25살에 중매로 만난 이중희 씨와 결혼하여 따로 살림을 차렸다. 첫 아들을 낳자 이름을 승규라고 지었다. 그리고 몇 년 동안 조금씩 돈을 모아 동네 한 복판에 있는 밭 200평을 샀다. 내 손으로 일해서 얻은 땅이기에 그는 너무 기뻐서 머슴살이를 그만 둔 후, 자기 밭에 농사지으면서 사람들이 부르면 가서 일했다.그가 30세 전 후, 몸에 이상한 증상이 나타나 고민했다. 즉 조그만 일에도 신경이 예민해져서 어머니나 아내에게 화를 냈다. 그러더니 우울증이 찾아왔다. 그가 어느 집에서 막일을 하다 갑자기 멍하니 어떤 생각에 잠기면서 만사가 귀찮아지며, 갑자기 죽고 싶다는 생각이
일화이야기
한국성결신문
2012.11.28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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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응현(柳應鉉)은 조선 말 한반도 격동의 시기요, 20세기가 시작되기 불과 이틀 전인 1899년 12월 30일, 문화 류(柳)씨 충경공 제31대 자손으로 전라북도 익산시 용안면 칠목리(일명 화정 마을)에서 출생하였다.당시 대부분의 가정이 그러했듯이 그의 집은 조상 때부터 전통적으로 내려온 유교집안이었다. 몇 대 조상까지는 벼슬을 하며 잘 살았다는데 고조부께서 당파싸움에 휘몰려 유배를 당하고 죽임을 당한 후, 가세가 급격히 기운 몰락한 가문 중 하나였다. 그의 집은 밭 몇 때기 농사로 겨우 입에 풀칠을 할 정도로 가난했지만, 일 년에 몇 차례 조상 제사 때가 되면 빚을 내서라도 제사를 드리느라 늘 살림살이가 궁핍을 면치 못했다. 그런데도 그의 부친은 옛 양반의 체면 때문에 남들처럼 바쁜 농사철에 남의 일을
일화이야기
류재하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2.11.21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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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결회관(총회본부) 건축은 홍 장로의 공헌 중 하나다. 홍 장로는 강남지역의 지리와 부동산에 정통했다. 건축 과정에서 공사비를 지불하지 못해 6차례나 공사를 중단한다고 통보할 때마다 홍 장로는 자기 사업의 파산 위험을 무릅쓰고 3천만 원, 때로는 6천만 원, 7천만 원짜리 수표를 끊어주어 공사가 진행될 수 있었다.그러한 노력으로 1980년 5월 13일 지하 1층 지상 10층의 성결회관이 완성되어 준공예배를 드렸다. 홍 장로의60회 생일을 맞아 아들 넷이 회갑연을 열자고 했다. 그러나 “교단이 회관을 건축하기 위하여 힘을 다하는데 부총회장인 내가 회갑연이나 하면 되겠느냐?”고 말한 홍 장로는 아들들이 모은 300만원으로 성결회관 출입문 밖 오른쪽 벽에 예수님이 양치는 명화 부조(名畵 浮彫)를 만들어 기증했
일화이야기
류재하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2.11.14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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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을 치료하고 삶을 꾸려가느라 여기저기서 빌린 돈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홍 집사의 가족은 또다시 길에 나앉게 되었다. 다행히도 홍기득의 처지를 안 교회에서 그를 교회의 사찰로 일하게 해주었다. 그리하여 아들 넷이 교회 사찰 일을 하고 홍 집사 부부와 막내는 종로 3가에 양복수리와 세탁소를 겸한 사업을 시작했다. 사업은 잘되어 2년쯤 지나 모든 빚을 갚을 수 있었다. 또 교인들의 기도와 변 권사의 안수기도로 홍기득의 병도 완치되었다. 그를 검진한 병원에서는 기적이라고 말했다.홍기득은 1964년 3월 24일 신흥교회에서 장로장립을 받았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리고 한번 쏟아진 하나님의 은혜는 계속되었다. 어느 날 친구의 권유로 고향인 양재동에 있는 집을 사게 되었다. 집을 사고 세를 놓은 지 얼마
일화이야기
이종무 목사(본지 전 주필)
2012.11.07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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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득은 재물에 욕심을 내어 신앙생활을 소홀하다가 두 번째 시련을 겪게 되었다. 그는 부산에서 생선을 사다가 서울에 가져다 팔면 두 배의 이익을 생긴다는 친구 조 씨의 말에 귀가 솔깃해져 어물도매업을 시작했다. 장사는 친구의 말처럼 많은 이익을 냈고 장사에 재미를 들인 홍기득은 주일성수를 하지 못할 정도로 바쁘게 보냈다. 신앙을 멀리한 그는 큰 낭패를 당했다. 홍기득은 큰 돈을 벌 목적으로 자신이 가진 돈 전부와 남에게 빌린 돈 1300만원으로 오징어를 한 트럭 사서 친구에게 서울 가서 팔아오라고 했다. 그런데 돌아올 날이 훨씬 지난 친구에게는 소식이 없는 것이었다. 그 친구에게 속았다는 것을 안 것은 몇 달이 지나서였다. 결국 있는 재산을 다 날리고 빚더미에 앉게 되었다.홍기득은 세상 물질을 쫓느라
일화이야기
이종무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2.10.31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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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득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고향 탈출을 결심했고 아무 희망도 보이지 않는 집을 도망쳐 나왔다. 당시 홍 장로의 나이 열여섯 살이었다. 홍 장로는 한밤중에 집을 나와 동이 틀 때까지 계속 걸었다. 새벽녘 그는 서빙고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서울로 들어섰다. 빈손으로 집을 나왔기 때문에 일자리를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하지만 어린 나이로는 취직하기가 쉽지 않았고 그는 공사판 노동, 야채장사, 생선장사, 날품팔이, 김포 농가의 머슴살이 등 닥치는 대로 일했다. 그러나 돈은 벌지 못하고 병만 얻게 되었다.홍 장로는 향학의 꿈이 더욱 멀어져만 가는 것이 몹시 안타까웠다. 어느 날, 홍 장로는 포천학교 교장이 된 소학교 담임선생을 찾아갔고 그분의 소개로 양복점에 취직하게 되었다. 그는 궂은 일을 도맡아하며 양복기
일화이야기
이종무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2.10.24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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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본부 현관 오른쪽 벽면에는 예수님께서 양치는 모습을 묘사한 장엄한 화강암부조가 있다. 조각 밑에는 ‘증 홍기득 장로. 1979. 8. 9.’란 문구가 새겨져있다. 이 조각은 홍 장로가 교단을 위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는 한 예다. 홍기득 장로는 30여 년 동안 성결교회 역사와 함께하면서 교단을 발전시킨 공로자다. 홍 장로는 성결회관의 건축, ‘한국성결신문’ 창간과 운영, 교회개척, 작은교회 지원, 부흥대책기금 조성과 증식, 교단 각 기관 및 초교파 연합기관 활성화 등 성결교회를 이끈 중심적인 인물이다. 이렇듯 큰 일을 해온 홍 장로의 인생은 결코 평탄한 길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살아온 가시밭 길이었다. 그가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은 신분임을 깨달은 후
일화이야기
이종무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2.10.17 13:21